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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가 필요 없는 그녀

정아는

by Bora

재석이 보기에는 정아는 하루 종일 바쁘다. 성경 66권 중 구약의 첫 장인 창세기에서 요셉이 꿈속에서 보았던, 땅에서 하늘에 닿았던 사다리에 천사가 오르고 내리던 것처럼 정아는 하루에도 수차례 2층 집 계단을 바삐 다닌다. 정아가 첫아이를 출산하던 날엔 새벽 4시까지 일을 했을 만큼 책임감과 열정이 컸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재석은, 결혼 24년 차가 가까워오고 있지만 깜빡 잊곤 한다. 정아는 재석과 참 다르다. 정아는 결코 가볍지 않은 몸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늘 에너지가 넘치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그에 반면 재석은 한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연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가 한번 자리에 앉으면 그곳에 새싹이 돋고 풀이 자라 숲을 이룰 만큼 웬만해서는 움직이질 않는다. 그에 비해 정아는 소파에 10분도 못 앉아 있다. 오늘도 텃밭에 나가서 풀을 뽑고 야채를 수확하더니만 의자에 잠깐 앉아 있다가 뭔가가 생각이 났는지 지체 없이 엉덩이를 들어 올린다. 요즈음은 유튜브 삼 프로에 꽂혀서 소리를 최대한으로 높이고 재석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부엌문을 슬그머니 닫는다. 유튜브에 영상 속도를 1.25배로 맞춰 놓고 말이다. 그녀가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야채를 씻을 땐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때문에 유튜브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법도한데 혼잣말로 "미쳤나 봐!" "이번 선거에는 누굴 뽑나?" "아, 진짜 웃기다."라고 중얼거린다. 참 재미있는 그녀다.


재석이 생각하기엔 정아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엔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 성적표에 양이 제일 많을 것이고 대학 성적은 C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정아는 어떤 일이 맡겨지면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열정과 책임감으로 임한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최대한의 장점이자 자산이다.

조용히 정아를 지켜보면 새로운 일을 할 때는 정말이지 머리가 200배로 회전되는 것 같고 눈빛은 깊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보다 더 빛난다. 그럴 때 보면 설거지를 하다가도 뭔가가 생각이 났는지 카톡에 메모를 하거나 이면지를 잘라 사용하는 메모지에 긁적거리곤 한다. 거기에다가 부엌에 걸어놓는 커다란 달력이 마치 개인 전용 다이어리인양 날짜마다 알록달록 글자를 적어 놓는다.

지난번엔 어느 모임에서 연로하신 한 분께서 마이크를 한번 잡아 보시려고 신세타령처럼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정아는 그의 질문에 차근차근하게 답변을 하고도 부족했나 싶었는지 며칠을 곰곰이 고민을 했다. 그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서 이리저리로 연락을 하더니 A4 두 장만큼의 정보를 만들어서 드렸다. 마이크를 잡았던 그 어르신은 다음번엔 본인의 의견을 한 번쯤은 생각하고 말할 것이다. 그런 열정이 넘치는 정아를 재석은 감히 말릴 수없다.


정아는 의자가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녀는 잠잘 때만이 침대에 몸을 눕힌다. 밤에는 집이 날아갈 정도로 천둥이 쳐도 절대로 깨어나지 않고 코를 드르렁거리며 잠을 자다가 이불을 들썩이면서 방귀를 뀌면 재석은, 웃음이 터져버리고 만다.

그랬던 그녀가 부엌일을 부지런히 끝내곤 책상 앞으로 달려가 의자에 꼬박 4개월을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본인에게 버거운 일이 맡겨졌는지 눈이 빠지도록 PC를 쳐다보더니 어느 날은 재석에게 도움을 구했으나 그는 단번에 거절을 해버렸다.

“그대에게 맡겨진 일은 그대가 알아서 하세요.”

정아가 제일 힘들어하는 것은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서 그것도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거의 컴맹에 가까운 수준이라서 무척 고될 것이지만 하루이틀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기에 재석은 그녀 스스로 일처리를 하길 바랐다. 어떤 때는 그녀는 일이 잘 안 풀리는지 손톱으로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면서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열심히 움직이곤 한다. 재석이 지나가다가 그녀 어깨너머로 흘끗 PC화면을 쳐다보면 HWP와 DOC와 엑셀을 넘나들면서 박스를 만들고 숫자를 타이핑하더니 프린트를 한다. 출력한 문서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재석이 사다 놓은 지 얼마 안 된 A4 용지 한 묶음이 거의 바닥이 났고 검은색 잉크젯을 몇 개나 사용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정아는 상관없다는 듯이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의자에 앉는 시간이 많아지기는 했으나 역시 몸에 불편한 옷을 입은 마냥 노트북 자판에 손가락을 올려놓기 전까지 혼자만의 의식을 치른다. 진하게 내린 커피와 레몬즙을 짜 넣은 뜨거운 물을 책상에 가져다 놓고는 약 30분 정도 PC에 깔려있는 카톡으로 지인들에게 생일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고 시댁카톡 방에다가 안부를 묻고 번뜩 뭐가 생각이 났는지, 070으로 양가부모님에게 전화를 건다. 결국에는 쓴맛에 가까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곤 어쩔 수없다는 듯이 노트북에 USB를 끼우곤 문서파일에 클릭을 한다. 그렇게 시동이 걸리기까지 지체되는 시간은 있지만 한번 몰입을 하면 정아의 등뒤로 재석이 몇 번이고 지나가도 한 번을 돌아보지 않는다. 자판과 그녀가 하나가 된 듯 두 손이 나비처럼 훨훨 춤을 춘다. 그렇게 그녀만의 시간에 몰입이 되면 엉덩이가 의자에 딱 붙어 있는 것처럼 몇 시간을 일어설 줄을 모른다. 그럴 때는 재석은 기꺼이 정아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물론 아이들조차 엄마에 시간을 존중한다.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서 자신만의 시간에 집중하는 정아의 뒷모습을 재석은 흐뭇하게 바라본다. 사랑하는 그의 정아를.



둘째아이와 친구들이 ( 학생 자율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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