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창문 너머로 보이는 7월의 타슈켄트의 하늘은 파랗고 맑았다. 마치 한국의 가을 하늘 같았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짐 검사하는 어깨가 넓은 공항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청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짐을 꼼꼼히 뒤적거린다. 그는 무엇인가 트집을 잡길 원했고 결국 우리에게 한국의 소주를 원했다.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입이 딱 벌어졌다. 밖에서 우리를 오랫동안 기다리던 최선배가 들어와서 러시아 말로 뭐라 뭐라 직원과 이야기를 한다. 그는 우리에게 새 볼펜이 있으면 한 자루만주면 된다고 했다. 한국 소주를 어떻게 공항직원이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급하게 짐 안에서 볼펜을 찾아남자에게집어던지듯 쥐어 주고는빠른 걸음으로 나와 버렸다. 볼펜을 받아 든 그는 아쉬운 게 많은 지 방금 입국한 한국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출입문에 서 있던 한 여직원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마네킹처럼 한 자리에 만 꼿꼿이 서 있었다. 그녀의 조그마 난 얼굴위로 눈, 코, 입은 마치 조각가가 끼워 맞춘 듯 완벽한 미모였고허리 사이즈는 마치 18인치는 될까 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간신히 입구를 빠져나오며 동행자에게 "너무 예뻐요. 러시아 여자"라고 말하자 그도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팔트 길바닥이 검붉은 색깔로 얼룩덜룩했다. 시내 가로수 나무가 오디 나무라니 참으로 신기한 나라다.
나는 M단체 간사로 이번 우즈베키스탄 방문은 5박 6일간 포상휴가로 오게 되었다. 콘퍼런스에 어쩔 수 없이 꼽사리로 끼게 된 것이다. 세분은 모두 M단체 교육 이사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최선배 센터이자 거주지는 아주 오래된 일반 주택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이 러시아에 속해 있을 때 지어진 주택이라고 한다. 주택 모양은 정 사각형이었다. 가운데 정원에는 자두나무 몇 그루가 있었고 정원을 가운데로 두고 왼쪽으로는 방 1개와 화장실, 부엌이 있었다. 가운데에는 나란히 방 3개가 있었고정원 오른쪽으로는 추운 나라답게 사우나 실이 있었다. 현관과 가장 가까운 왼쪽에는 50여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커다란 거실이 꽤 인상 깊었다. 거실로 들어가는 문은 양쪽으로 열을 수 있는 나무문이었는데 바닥은 마치 1980년 초 한국의 초등학교 교실바닥과 거의 흡사했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 밑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마치 추억의 소리처럼 들렸다. 거실 지하실에는 또 다른 방이 있었다. 밀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실 바닥에 깔린 두껍고 넓은 카펫을 치워야만 했다. 그 지하 방으로 내려가려면 사닥다리를 이용해야 만 했다.
최선배의 집이 우리들의 숙소이며 콘퍼런스 장소가 되었다.사실 이번 방문은 우즈베키스탄 대학의 미래 전망과 한국대학교의 현주소를 발췌한 것을 발표하고 토론과 질의응답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콘퍼런스는 명목상이기만 한 것 같다. 최선배 가족을 위로하러 온 목적이 분명했다. 그런들 누가 뭐라 말할 사람은 없는데 M단체에서는 이번 방문을 참으로 거창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의 참석 이유 또한 포상휴가라는 명목을 부여하니 동료들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까지 생겼다.이런저런 불편한 마음이 앞서니 2박 3일 동안의자에 앉아있는 내내 삐그덕 거리는 거실 바닥 소리는 회의가 속히 끝나길 바라는 내 마음의 소리 같았다. 사실 내 마음은 타슈켄트에도착한 그날부터 오디가 가득한 거리를 향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잠시 보았던 러시아의 화려한 금발의 젊은 아가씨들이 넘쳐나는 그 어디든 달려가고 싶었다. 내 나이는 피 끓는 스믈 여덟이었다. 탁상공론하는 회의따위는 사실 안중에도 없었다.
1992년 한국과 수교를 맺은 우즈베키스탄은 6년이 지난 시점에도 러시아의 사회주의 분위기가 깔려 있었고 이슬람 지역이라서 타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다. 사람들은 단체로 모일 때마다 그 안에 스파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고 종교 활동으로 발각될 경우 즉시 외국인은추방이 되었다. 공안들은 리스트 안에 외국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적어 놓았다. 그때최선배도 대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는 학생 신분으로 있었기에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나이 삼십이 넘은 외국인의 공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콘퍼런스기 끝나는 날 저녁 최선배의 아이 100일 잔치가 열렸다. 우리들이 한국에서부터 들고 왔던 하얀 백설기가 거실 중앙에 놓였다. 최 선배 장모님이 한국 떡집에서 맞추어준 눈처럼 고은 백설기는 잔치에 모인 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해갈시켜주는 선물이었다. 아기를 축하하기 위해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아기는 축복 그 자체였다. 모인 사람들 눈빛에서는 "아가야, 타국에서 너 때문에 우리가 좋은 시간을 갖게 되었어. 고맙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고 생후 100일밖에 안 된 아가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해맑게 웃었다.
모유밖에 못 먹는아기 생일 상으로 잡채와 김치, 샐러드와 불고기, 김밥, 전그리고 각종 반찬들 또한 한창 시즌 중인살구와 체리가 차려졌다. 모인 이들 중엔 사업가, NGO사람들, 지사 파견 근무자, 종교단체 사람들이 모였다. 아기의 100일 잔치로 초대된 이들의 얼굴에는행복감이 가득 넘쳤다. 내 팔에 안겨있던 아가도 '까르륵까르륵' 웃으며 행복에 장단을 맞추었다. 기특한 아기였다.
나는 어느 장소를 가게 되면 냄새로 기억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때론 사람에게도 그렇다. 이 집의 화장실 냄새는 한국의 냄새와 달랐다. 대체적으로 한국의 가정집 화장실은 습하다. 물론 휴지질은 무척 좋다. 두루마리 휴지에 볼펜으로 메모를 할 정도니 말이다. 이곳화장실은 건조하고 러시아의냄새가스며있었다.휴지는 질이 좋지 않은 흐릿한 하늘색과 분홍색이었다. 휴지를 자를 때마다 햇살 사이로 날리던 먼지, 그 사이로 소비에티의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최선배와 한글학교 선생님 두 분과 로칼 시장에 갔었다. 과일과 야채 그리고 고기를 파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체리 바구니가 아줌마들 앞에 진열되어 있었다. 아줌마들은 키가 크고 몸집은 컸다.아줌마들은 우리가 구입한 체리를 바구니가넘치도록 채워 주셨다. 세계의 아줌마들은 역시 맘 좋고 인심히 넉넉하다. 내가 바라던 아름다운 러시아의 여인들은 시장 안에서는 보이질 않았다.
드디어 콘퍼런스가 끝나고 점심을 먹은 일행은 잠시산책을 나왔다. 5층짜리 오래된 아파트 앞에서 햇빛을 쬐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까만 선글라스에 검정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그 옆에 같은 색 정장을 입은남자가 아파트에서 나왔다. 여자는 강아지 목줄을 손에 쥐고 있었다.
와우, 내가 바라던 그 모습이었다. 정말, 영화 자막을 확 찢고 나 온 커플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나는 맥 놓고 그들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강릉에서 오신 분이신지 순천에서 오신 분이신지 모르겠지만놀리듯 "그렇게 쳐다보다 총 맞는다. 러시아 사람들은 집에 총기를 소지한다고 하더라."그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었지만그 후, 우즈베키스탄에있는 동안현지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최선배가 운영하는 한글학교 학생들과 미팅을 가졌다.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려인들이었다. 까만 머리와 까만 눈, 그 눈은 몽골 인들과 흡사할 정도로 강렬했다. 한국어가 어눌한 고려인 젊은이들은 한글을 배우는 열의가대단했다. 타슈켄트 교육대학에서도 한국어과가 있는데 그곳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은 한국말 수준이 탁월했다. 한국어를 배우는 청년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한국기업이나 한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고려인 청년들 중에 유일하게 한 명의 러시아남자 청년이 보였다. 머리카락은 금발이었고 키가 작고 몸이 다부진 청년이었다. 그의 모습은 단연코 청년들 사이에 눈에 띄었다. 교육대 학생인 이골 그는 똑똑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중에 늘씬하고 예쁜 정 악사나, 키가 작고 눈이 날카로운 최왈랴, 남자 고려인 치고는 키가 큰 장 제니스 등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훗날 이 청년들을 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정 악사나는 한국 회사에 통역과 번역사로 일하게 되고 한국 남자분과 결혼을 한다.
최왈랴, 장제니스, 이골이를 한국에서 공부하는 중 가장 힘든 시기에 만난 기억이 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부모님들도 다 고려인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고려인들이었다.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지켜가는 방법으로 동족과의 결혼을 선택한 것 같았다. 고려인 4세들의 한국말 수준은 조부모에게서 듣고 자란 몇 마디 인사말 그리고 몇 개의 단어들뿐이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에게서는 근면과 성실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나 고려인들 중에 부유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온 우리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호기심과 동경심 어떤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학생들 대부분이 한국 음식을 좋아했지만 그들이 먹는 된장과 김치는 세대를 걸쳐 내려오면서 지금의 한국의 음식 하고는 많이 다르다. 날씨가 추운 나라라서 그런지 빵이나 케이크도 설탕이 씹힐 정도로 달달함은 눈이 찔끔 감길 정도였다. 한 번은 고려인 할머니 댁을 방문했는데 한 조각 먹은 케이크 맛은 잊을 수 없다. 설탕이 아작아작 씹히는맛에 목이 막혔다.
한 핏줄이라는 그 서글픔 속에 한국의 성을 갖고 우즈베키스탄 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눈에 자꾸 아른거렸다.
마지막 날 대형버스를 타고 우리는 어느 지역을 방문했다. 버스 안에는 최선배 가족과 한글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 그리고 M단체 일행 총 20명쯤 함께 소풍을 떠났다. 러시아 땅덩어리는 컸다. 하이웨이 도로를 달려도 양옆에 지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타슈켄트가 뜻이 돌이라고 하는데 역시 가는 곳마다 돌산들이 가득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머리카락이 날렸다. 뒤에 앉아 있던 고려인 청년이 어색하게 한국어로 말을 붙인다.
"리 간사님, 우즈베키스탄 좋아요?"
"네, 우즈베키스탄 좋아요"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계속 말을 걸어왔다. "리 간사님... "
우리들은 휴게실에서 파는 사슬리라는 양고기 꼬치를 먹었다. 중앙아시아를 방문 한 사람들은 꼭 한 번은 먹어봐야 한다는 양고기는 과히 맛이 좋았다. 우즈베키스탄 어느 시골길에서 먹었던양고기꼬치는 단연코 최고였다.
1998년 7월 첫 주, 1주일간의 우즈베키스탄의 방문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날씨는 맑고 건조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은 나와 같은 고려인이었고 땅은 광활하고 넓었다. 젊은 러시아인들은 아름답고 잘 생겼고 그리고 오디와 체리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포상휴가라고 갔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은 컸지만 지금까지 내내 아쉬운 것은 그곳의 국립박물관이며 소소한 문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즈베키스탄 방문은 휴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타쉬켄트의 냄새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