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다. 나의 유년기
나는 너에게 16편의 러브 레터를 보낼 거야. 네가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의 사랑고백으로 아마도 피부에 닭살이 돋을 수 있겠으나 제발 꾹 참고 끝까지 읽어주길 바라.
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지낸 곳은 충청도 아산군 매곡리 1구 (구 주소), 일명 맹골이라는 곳에 있는 꼭대기집이다. 이웃이라곤 우리 집 바로 아래에 유별나게 깔끔한 할머니가 큰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할머니 집 때문에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높은 곳에 산다고 해서 꼭대기 집이라고 불렸다. 그 덕분에 나는 산바로 아래에 담이 없는 비밀정원 같은 곳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지냈다. 동네가 꽤 커서 그런지 우리가 사는 쪽은 소롱골이었고 문안, 큰 뜸, 벌뜸, 강당뜸, 양지편으로 나눠서 불렀다. 동네 아줌마들은 아들 셋에 딸 하나인 내가 엄마손을 잡고 일명 구멍가게라고도 불린 구판장을 가기라도 하면 심술궂은 표정으로 쳐다보며 친한 척을 하곤 했다.
“아이고, 누구여, 꼭대기 집 주생이 딸이 아니여?”
"맞네, 맞아. 저 짙은 눈썹이 주생이를 꼭 닮았네. 그려"
나중에 알고 보니 동네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 이름을 호적등본에 적혀있는 것과 다르게 불렀다. 맹골이란 동네에서 태어나 결혼을 하고 자식까지 낳았으니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주생이란 이름은 어렸을 때부터 불렸던 것 같다.
“아가, 니 이름이 뭐여?”라고
아래 마을에 사는 동네 어르신들이 내게 물으면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해 엄마 등뒤로 숨곤 했으니 어렸을 때부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집둘레가 온통 산과 과수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니 낮엔 발로 다닐 수 있는 곳은 다 나의 놀이터였으나 밤만 되면 불빛 한점 없는 문 밖으로 나가기조차 무서웠다. 혹여나 밤에 자다가 깨어나서 엄마가 눈에 안 보이면 큰일이 난 것처럼 울어 재키 곤 했다. 그럴 때면 세 오빠들은 나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엄마 없이는 한시라도 안 되는 엄마쟁이였으니 늘 나는 엄마와 함께였다. 3남 1녀의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은 나를 가족들은 ‘방글이’라고 불렀다
아이는 철이 들고부터는 냉정하리만큼 고향과 부모형제를 뒤로 하곤 서울과 수원 그리고 인천으로 자리를 옮겨 다니며 살다가 캐나다가 아닌 아프리카 케냐에서 18년째 살아가고 있다. 엄마의 자궁 같았던 산꼭대기 집 딸아이는 어떻게 그 세계를 떠나 케냐로 왔을까. 가끔은 나조차 그 사실이 참 신기하기만 하다. 유년기에 마냥 행복하게 살았던 꼭대기집은 지금까지도 나의 영혼에 깊숙이 영향을 끼친다. 인생이란 길에서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오뚝이 같은 힘이 되었다.
방글아,
유년기에 너를 생각할 때면 그냥 좋다. 꼭대기집 그 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나면 마냥 행복하기만 해. 소박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너는 그러고 보면 참 행운아야. 이번 생에 너를 만날 수 있어서 참 고맙고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