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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 울타리와 칠면조

사라진 풍경은 더 아름답게 남는다.

by 시준 Mar 08. 2025

시내 중심이던 누문동에서 변두리인 월산동으로 우리 가족이 갓 이사 왔을 때 돌고개에서 우리 동네까지 들어오는 길은 달구지가 지나다닐 만큼의 흙길이었다.  돌고개를 넘으면 바로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길의 초입에 커다란 당산나무가 서있고 가지에 붉고 노란 천들이 걸려있었다.

약 칠백미터는 더 걸어 들어가야 우리 마을이 나오는데 그 길을 걷는 중간에 왼편으로 경사 완만한 동산 자락에 걸쳐 미국 남침례교회 선교사들의 커다란 사택 몇 채가 널찍하게 자리 잡았다. 모두들 ‘선교사집’이라 불렀다. 높은 지붕으로 멋들어지게 지어진 비슷비슷한 서양식 집들이었다. 부지 가운데에 큰 창고가 있고 집들을 이어주는 포장된 내부 도로와 잘 가꾸어진 정원이 촘촘하고 높은 탱자나무 울타리에 아늑하게 둘러 쌓여 있었다.


어린 기억 속의 광경이지만 일생에 본 나무 울타리 중에서 가장 잘 가꾸어진, 높이가 삼 미터는 되고 폭도 일 미터 이상되게 촘촘한 탱자나무 울타리가 압권이었다. 봄이면 길 따라 도열한 탱자나무가 초록 가시 사이로 하얀 탱자 꽃을 피워냈다. 가을이면 가시 날카로운 가지마다에 촘촘히 달린 노란 탱자를 구경하며 향기 물씬한 길을 걷게 했다. 탱자나무 울타리 중간에 커다란 철문이 있는데, 나와 형들은 이 문을 통해 선교사 마을로 특별한 심부름을 다녔다.


우리 마을 어귀에 작은 침례교회가 있었다. 선교사 마을과 관련이 있는 교회였던 것 같다. 어릴 적 기억이라 이름이 잊히지도 않는데, 일신 침례교회이다. 동생들과 성탄절에 선물로 주는 떡과 과자를 받으러 간 추억이 있는 교회인데 우리가 이사하고 몇 년 안 되어 이 교회와 선교사 동네가 먼 곳 어디론가로 이전했다.  바야흐로 도시 변두리 월산동 호남 주택의 인근이 모두 주택단지 부지로 바뀌고 광주시가 본격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달구지에 실려온 닭장과 이에 수반되는 노동은 누문동에서와 다를 바 없었는데, 이웃에 너그러운 시절이었지만 주택단지에서 양계는 마을 민원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비 오는 날의 닭똥 냄새는 고약하다. 멀리서 사료를 사서 나르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 양동시장 닭전머리의 사료 가게에서 사서 날랐다)

마을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는 결국 닭장을 없애는 결단을 내리셨다. 대신 어떤 연유로 시작하게 된 것인지 내 기억에는 없지만 선교사 마을로부터 위탁받아 칠면조를 기르게 되었다. 대문 옆 좁은 마당 한편에 칠면조 사육장을 만들고 칠면조 병아리 여섯 마리를 길렀다. 수놈이 두 마리였다. 형제들의 관심 속에 칠면조들은 무섭고도 억세게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 인가 계란보다 두 배는 큰 커다란 갈색알을 낳기 시작했다. 날이 따뜻해지면 암컷들은 일주일에 두세 개씩 교대로 알을 낳아주었다. 어머니는 칠면조 알로 넓게 전을 부쳐 잘라서 도시락을 싸가야 하는 나와 형들의 도시락에 넣어 주셨다. 계란대신 칠면조 알이 우리들의 단백질원이 된 것이다.


칠면조는 커가면서 철망 안에서 서로 툭하면 싸웠다. 키가 일 미터는 되게 자란 놈들이 목을 빼서 세우고 서로 노려보면 무섭다. 싸우더라도 서로 다치지 않게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을 잘라주어야 한다. 검게 윤기 나는 수놈들의 자태와 눈초리와 부리는 철망 밖에서 봐도 무섭다. 갈색 암놈들도 사납기는 마찬가지다. 중고등학생인 형들이 무장하고 들어가 그 임무를 완수하다 보면 그 와중에 몸부림치다 빠지는 숫 칠면조의 멋진 깃털 몇 개는 얻을 수가 있다.

부활절과 미국의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 주문대로 큰 칠면조를 골라 달려들어 발을 꽁꽁 묶어 리어카에 싣고 형제들이 함께 끌고 밀어서 선교사 마을로 간다. 친절한 미국인 부인은 칠면조를 잘 키워 잘 묶어 싣고 온 우리들을 칭찬하고 나무 자(scale)나 통통 튀는 스펀지 공 같은 선물을 주셨다. 나는 칠면조를 통해 미국 영화에 나오는 미국 문화를 더 잘 이해한 것 같다. 그 시절에 칠면조가 아니었으면 부활절이니 추수 감사절이니 하는 미국 명절을 우리 형제들이 알턱이 없었을 것이다.

칠면조 위탁 사육은 선교사 촌이 딴 곳으로 이전할 때까지 계속했고 칠면조는 형제들에게 여러 가지 귀찮은 고생과 자랑거리 추억을 남겨 주었다.

칠면조를 드실 선교사들께서 떠날 때쯤엔 마을에서 더 이상 칠면조나 다른 가축을 기를 수 없게 되었다. 칠면조를 다 넘기고 남은 한 마리를 우리 가족이 커다란 솥에 닭백숙처럼 삶아 먹었다. 영 질기고 맛이 없었다. 영화에 나오는, 오븐에 구워 먹음직스러운 갈색 빵껍질 같은 정통 미국식 칠면조 요리는 어떨지 궁금하지만 먹어보지 못했다.


선교사들이 떠나고 얼마 후 그 풍성하던 탱자나무 울타리는 모두 파내어지고 선교사 가족들이 살던 멀쩡하던 미국식 주택은 한꺼번에 철거되었다. 대신 고만 고만한 집들이 그 부지에 빼곡히 들어차고 집집마다 시멘트 담장으로 둘러싸였다. 그 앞의 걷기 좋던 흙길은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되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다섯 번도 더 변했을 세월 속에 어쩌면 이 동네의 이 정도 변화는 다른 도시에 비하면 참 느린 셈이다. 하지만 변화가 아무리 느려도 사라진 것은 되살릴 수 없다.

아름다웠던 풍경이 사라지고 남은 기억조차 희미해지면 상상 속의 풍경은 더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래서일까, 아득한 시절이지만 이 동네 선교사 사택의 탱자꽃 만발한 울타리와 칠면조 키우던 어느 집 소년들을 기억하는 분이 왠지 어디엔가 계실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복상골집 텃밭가에 심어 내 키를 훌쩍 넘어 해가 갈수록 무성하게 커가는 탱자나무는 아련한 선교사 마을의 탱자나무 울타리를 나름 오마주한  것이다. 겨울을 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에도 시험 삼아 일 년생 묘목을 심은지 무려 팔 년이 지나자 처음으로 한그루에서 몇 송이 꽃을 피웠다. 정말 반가웠다. 십 년이 넘을 때부터 꽃도 많이 피고 탱자도 무수히 열린다.

봄날 콩만 한 탱자꽃망울이 맺힐 때부터 하얀 꽃잎이 활짝 열릴 때까지 몇 번이고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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