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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동 호남주택

팽창과 쇠락

by 시준 Mar 15. 2025

 1968년 월산동으로 이사 온 시점의 마을 주변을 돌아보자. 낯선 동네의 남의 집 얘기에 관심을 가지실 분 드물겠지만, 순전히 나와 형제들의 기록을 위해, 그리고 광주광역시 권역 확대 역사의 작은 일부를 조카들에게 들려주는 셈으로 적어 남긴다.  지루할 수 있으니 커피 한잔 드시며 눈길 가는 대로 음미(吟味)하시길~


앞 글, 달구지로 이사하던 날에 얘기한 ‘돌고개’는 그 시절 빛고을 광주의 시내와 변두리의 구분 기점 중 시내의 서쪽에 위치한 유명한 고개이다. 돌고개에서 이어지는, 송정리로 가는 국도는 왕복 8차선은 될 정도로 도로 기반을 널찍하게 닦아놓았는데 당시엔 돈도 없고 오가는 차도 많지 않아서 도로 가운데의 왕복 2차선만 아스팔트로 포장한 상태였다. 멀리 도로가 굽은 곳에 한동안 청기와 주유소만 외로이 서 있고 도로 가까이에 토기를 만들어 파는 집들이 있었다. 이 고개 넘어 몇 백 미터쯤 송정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농촌 진흥청의 널찍한 농사시험장 들판이 나오는데, 이 농사 시험장 너머에 우리 동네가 있었다.  농사 시험장이 있을 만한 곳이었으니 광주시에 속했어도 시골이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시내에 살다가 농사짓는 시골 들판 가운데로 이사 온 셈인데, 실제 우리 마을과 인접한 오래된 동네의 당시 이름이 ‘신촌’이었다.  

휑한 허허벌판에 빨간 기와집 수십 채가 다닥다닥 붙은 성채 같은 동네가 멀리 시야에 갑자기 들어선 모습이니 당시엔 모두가 궁금해할 만했다. 그래서 가족이 살던 사택을 나와 어디론가 이사를 해야 할 부모님도 이 동네에 관심을 가지셨을 것이다.


월산동과 농성동에 걸친 들판 가운데에 있던 낮은 황토 야산을 밀어 주위를 둘러 높은 석축을 쌓고 한 채 당 대략 60평 정도의 대지에 50여 채의 단독 주택을 지을 수 있는 새로운 동네의 택지를 조성했는데 (시에서 했는지 민간업자가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 동네를 ‘호남주택단지’로 불렀다. 택지 조성과 함께 비슷한 구조의 단층 벽돌 기와집 50여 채가 들어섰다. 하나의 설계 도면으로 표준화해서 지은 것을 보면 도시 팽창과 함께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집장사'가 분양을 한 것 같다. 양옥도 아니고 한옥도 아닌 절충식 가옥이라 불렸는데, 특이하게도 푸세식 변소가 집 내부로 들어와 있는 구조였다. 주기적으로 분뇨수거차량(똥차)이 와서 퍼가야 하니 그것도 어설픈 절충식의 일부였던 것 같다. 동네에 똥차가 오는 날의 그 구수함이라니!


집의 내부 구조는 비슷했지만 몇몇 집은 기와지붕대신 슬래브 지붕이었고 특이하게 우리 집 앞집만 슬래브 지붕의 이층 집이었다. 마을의 유일한 이 층집 뒷집이라 우리 집은 그늘져 어두웠다. 아마도 그래서 그 집이 우리를 위해 비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벌판 위에 솟아난 성채 같은, 그리고 '호남주택'이라 이름까지 붙은 우리 동네를 주민 모두 은근히 자랑스러워한 것 같다. 모양이 비슷비슷한 붉은 벽돌집이 구획된 부지에 한꺼번에 50여 채가 들어선 것은 분명 도시의 새로운 시도였다. 골목의 양쪽 담장도 모두 붉은 벽돌로 쌓았고 양쪽이 붉은 벽돌벽 사이의 좁은 골목은 각각의 집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이 왁자지껄 노는 놀이터이자 운동장이었다.


마을 어디에도 ‘호남주택’이라는 팻말 하나 없었지만 이 ‘호남주택’의 구전 위력은 거의 삼십 년 넘게 지속했다. 당시 광주시의 택시 기사들은 손님이 ‘호남 주택’하면 고개 끄덕이고 틀림없이 모셨다.

금세기 들어 광주의 택시 기사들 중 몇 분이나 ‘호남 주택’을 아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광주에서는 ‘호남주택’을 아는가 모르는가가 50대 전인지 후인지 세대 구분의 척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치 한국에서 코미디언 ‘이기동’을 아는가 모르는 가로 베이비붐 세대와 이후의 세대가 구분되듯이.


동네 서쪽에는 과수원이 둘러싸고 있고 서북쪽 석축 아래 논밭은 드넓은 농촌 진흥원 농사시험장과 닿아 있었다. 시험농장 가운데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직사각형의 축구장 반 만한 저수지가 있었는데, 동네 악동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동네 또래들과 농사시험장 보리밭에서 덜 여문 보리이삭을 불을 피워 구워 먹다가 화가 잔뜩 난 수위 아저씨에게 쫓기면서도 놀리며 저수지를 빙 둘러 낸  좁은 농로를 몇 바퀴나 돌아서 도망쳤던 저수지이다.  그 저수지는 메워져 현재의 농성 초등학교의 일부가 되었다.


돌고개에서 십분 정도 시골 농로 같은 찻길을 걸어오는 중간쯤에 잘 가꾼 탱자 울타리로 둘러싸인 미국 선교사들이 사는 집 몇 채가 이국적인 풍경으로 서 있었다. 동네 입구에 작은 침례 교회가 있었고 이 교회 너머 동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벌판이 꽤 가파른 야산 구릉으로 이어졌다.

이 동쪽 구릉 언덕에 오르면 멀리 포근하면서도 장대한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형제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생이 되어서도 무수히 넘어 다니던 언덕이었다. 이 벌판과 구릉의 높은 곳까지 모두 주택지로 바뀌었고 집들이 착착 들어서기 시작했다.

앞에 설명한 대로 마을의 남쪽에는 ‘신촌’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 있었는데, 아마도 동네 이름처럼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었을 텐데 나중에 들어선 호남 주택이 생기고도 여전히 신촌마을로 불렸다. 신식 양계장이 있었고 집에서 두부를 만들어 파는 집도 있었다. 우리 형제들은 그 두부 사 오는 심부름을 자주 다녔고 가끔은 콩비지를 얻어 오기도 했다. 집에 닭장을 없앤 후로는 양계장도 심부름 코스였다. 신촌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오래된 주월동 시골 마을들이 굽이굽이 있었는데, 오 학년 때인가 그 마을을 지나서 이어지던 평범한 야산 소나무 숲에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추억 어린 동쪽 구릉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우리 동네인 호남주택, 신촌, 농사시험장 그사이의 과수원들까지 다 내려다볼 수 있었고 텅 빈 논밭 넘어 멀리 대건신학대학을 품은 낮은 야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먼 곳에 우람하게 서있는 무등산도 잘 바라보였다.  

구릉의 능선 한쪽 끝이 돌고개였고 반대쪽으로는 으스스한 공동묘지가 있었다. 나는 양림동에 있는 중학교를 다닐 때 아침저녁으로 묘지 한가운데로 난 오솔길을 지나가야 했다. 하굣길에 비 오는 날이면 으스스해서 돌고개로 빙 돌아서 집으로 왔다. 이 공동묘지를 지나면 봉우리에 높은 안테나가 세워진 ‘안테나 산’이 있었다. 이 안테나산의 남쪽에는 부랑아를 모아가두어 키운다는 무서운 소문의 무등 갱생원이 있었고 그 너머에 백운동 도축장이 있었다. 그 도축장은 아버지를 따라간 적이 있는데, 아름답지는 않으나 강렬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번화한 도시의 복판이 되었지만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그곳 교차로를 지날 때마다 나는 그곳에 있던 도축장의 광경을 떠올릴 수 있다.


호남주택 단지의 한 복판에 있던 우리 집으로 통하는 골목 입구에 마을의 유일한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가게 간판이 ‘경남상회’였다. 고향이 경상남도 진주인 나이 든 부부의 가게였는데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진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단골들과 잘 어울렸다. 우리 형제들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남편이 돌아가시고 남은 부인이 홀로 오래도록 가게를 지켰는데 허리가 심하게 굽어서 힘들어하면서도 동네 통장일까지 보셨다. 그 자리에서 30년 정도는 가게를 하셨던 것 같다. 광주에서, 그것도 ‘호남주택 단지‘에서 유일했던 가게 이름이 ’ 경남상회’였는데 그 간판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때는 지역감정이라는 혐오스러운 말도, 타지방 사람에 대한 차별이란 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오십 년을 지내셨던 월산동 호남주택과 주변 얘기를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한셈이다. 우리 가족이 월산동으로 이사했을 때는 주변이 온통 논밭뿐이었지만 몇 년이 안되어 주변 들판이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집들로 들어차고 사람이 몰리자 월산동에 번호를 붙여 행정구역을 쪼갰다. 우리 집은 월산4동에 속하게 됐다.


구릉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농촌진흥청과 동네 뒤편의 과수원을 관통해서 도축장까지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널찍하고 시원하게 나있던 도시의 ‘외곽도로’는 순식간에 도시의 작은 찻길이 되었다. 그 길이 나고 채 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언덕 아래 시야 끝까지 빼곡히 집들로 들어찼다. 팔십 년대 초 젊었던 어느 날 밤 친구와 그 언덕에 앉아 까만 밤하늘 아래 곳곳에 떠있던 붉은 네온 십자가 개수를 헤아려보던 때가 어젯밤에 꾼 꿈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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