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등하굣길

그리운 학교 생각

by 시준 Mar 22. 2025

수창학교가 있던 누문동에서 변두리 월산동으로의 이사는 우리 형제들의 다리를 튼튼하게 했다. 말 그대로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있던 학교가 한없이 멀어졌다. 월산동에서는 중학교도 멀었고 고등학교도 멀었다.

이사하던 해 나는 5학년 넷째는 3학년이었다. 마침 중학교 입학시험이 폐지되고 은행알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받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었다. 입학시험을 목표로 5학년부터는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시키고 과외공부를 하던 관행도 없어졌다. 동생과 함께 등교하고 낮시간에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나는 6학년, 넷째는 4학년이 되고 막내는 1학년으로 입학했다. 아침이면 동생들을 데리고 월산동 집에서 2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누문동 옆 수창학교까지 갔다. 어떤 날은 고교생, 중학생이던 형들과 아침에 함께 집을 나서서 누문동까지 무리를 지어 가기도 했다.  농촌 진흥청 농사시험장 저수지와 묘포장이 있던 농성동 밭 길을 십 분 정도 걷다 보면 돌고개가 나온다. 거기서부터는 계속 내리막 길이라 아침 등굣길은 수월하지만 학교가 파하고 돌아오는 하굣길에는 긴 언덕길을 계속 올라오느라 땀이 난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막내 꼬마에게는 너무 멀고 위험한 찻 길이었다.


60년대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절이다. 사람이 모여드는 대도시의 초등학교 저학년은 2부제로 수업했다. 따라서 초등 저학년들은 일주일마다 오전반과 오후반이 교대로 바뀌었다.

예외적인 날도 많았지만 보통은 동생들은 오전반이었다가 다음 주에 오후반으로 바뀌더라도 학교는 아침에 모두 함께 가야 했다. 동생들의 등하굣길 인솔 책임자는 자연스레 나였다. 오후 수업시간이 될 때까지 동생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놀았고, 오전반 일 때는 6학년 수업을 마칠 때까지 동생들은 학교 연못가나 등나무 그늘에서 엄마가 싸준 간식거리를 먹고 놀고 있다가 만나서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가끔은 수업 중에 교실 창밖에서 큰소리로 집에 가자고 나를 부르곤 했다. 담임이던 윤선생님도 밖에서 외치는 녀석들이 내 동생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고, 윤 선생님은 똑똑했던 큰형의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래서 올망졸망한 우리 형제들을 귀여워하셨다. 비 오는 날이면 동생들은 교무실이 있던 건물의 넓은 현관 복도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복도를 걸었는데 나무판자 바닥인 복도는 반짝반짝 빛나게 초와 들기름으로 광을 내서 매끄러웠다. 교무실이 있는 현관 복도는 넓어서 여럿이 앉아있기도 누워있기도 뒹굴고 놀기에도 좋았고 청소도 잘 되어있었다.


하교 길은 해찰하기 좋은 길이었다. 동생들은 나를 졸랐다. 학교 앞의 잡상 수레와 길가에 펴 놓은 좌판의 유혹을 무시하고 막내 손을 잡아끌고 지나갔지만 광주천 다리를 지나면 바로 또 큰 시장을 지나야 했다. 언덕 위의 돌고개까지 길가엔 온갖 군것질 거리가 널려 있었지만 지극히 당연하게 나나 동생들이나 빈털터리였다.


비바람이 부는 날 등하교는 골치였다.

우산을 쓰고 먼 등굣길을 혼자 걷는 것도 힘들고 싫은데 제 발길 가는 데로 가는 동생들을 한 손에 가방 다른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몰고 가기는 더 힘들었다.  등에 가방을 멘 동생들을 둘이서 손잡고 내 앞에 걸어가라고 하면 서로 한눈을 파느라 발걸음이 더 느려졌다. 그때는 신발도 물려 쓰던 시절이었다. 봄여름엔 모두가 바닥이 닳은 타이야표 검정 고무신을 신었고 비 오는 날 장화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종일 비가 오다가 마침 하교 시간에 맞춰 비가 딱 그치고 운동장 곳곳에 물 웅덩이가 생기던 어느 날, 집에는 천천히 가기로 하고 환한 햇살이 반사되던 제법 큰 물 웅덩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신기하게도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물 위를 매끄럽게 미끄럼 타는 소금쟁이를 관찰하며 동생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날이 있었다.

학교의 구석구석과 그 속에서 있었던 단편들이 잊히지 않을 화석처럼 선명하게 흐뭇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비 오는 날의 운동장 웅덩이의 소금쟁이와 놀던 날은 아마도 많은 이들의 어린 시절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몇 개반 수백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게 수십 미터 길이의 그늘을 드리워 주는 등나무만으로도 역사 깊은 수창 학교였다. 등나무가 타고 올라가게 설치한 철제 프레임을 우리들 몸통만 한 굵기로 똬리를 틀며 올라간 등나무 줄기, 그 넝쿨마다에서 연보랏빛으로 늘어뜨린 등꽃 향기와 진동하던 꿀벌들이 윙윙대는 소리,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긴 가지를 머리카락처럼 늘어뜨린 우람한 버드나무와 그 물그림자 아래 촘촘히 피어있던 노란 난초와 청보랏빛 난초 그리고 창포가 흐드러진 연못이 상상하는 머릿속에 더 아름답고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수창에 다니던 아이들 마다 수백 번은 기어올라가 미끄럼을 타던 강당 앞 운동장가에 놓여있던 커다란 거북 바위가 잊힐 리 없다. 아이들의 바지 엉덩이도 닳고 바위도 닳아 반질 반질 매끄러웠다.


60년대는 초등학교마다 아이들로 넘쳐났다. 신문과 라디오에선 학교를 말하면서 ‘콩나물시루’라는 표현을 보통 명사처럼 사용했다. ‘시루’라는 물건을 자라면서 보지 못한 요즘 청년들은 그 이미지를 떠올리기 어려울 것이다.

나무조각으로 직경이 한자쯤 되게 둥글게 통으로 만든 시루 안을 꽉 채우고 노란 대가리를 부딪히며 콩나물들이 날마다 쑥쑥 자라 올라오는 모습은, 당시 초등학교 교실 모습을 제대로 표현한 셈이다.

수창학교는 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말 그대로 미어터지게 다녔다. 당시 고학년은 21반이나 있었고 한 반에 90여 명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가득했다.

당연하게도 학교에 교실이 부족했다. 4학년때는 한참 떨어진 다른 동네에 새로 짓고 있던 학교의 일부 교실을 서둘러 일찍 준공해서 4학년만 그곳으로 이동해서 수업을 했다.(이 공사 중이던 학교는 이듬해에 중흥국민학교로 열었다.)

5학년때는 교실이 부족해서 부득이 큰 강당을 합판으로 나누어 막아 열개정도의 교실로 나누어 사용했다. 강당 천정이 3,4층 높이로 까마득이 높아서, 합판과 각목으로 4미터 정도만 벽을 세워 교실 칸을 나누었다. 교실 벽체 위 공간은 서로 통해 있어서 온 교실에는 항상 무언가 울리는 소음이 맴돌았다. 그래서 각반 담임 선생님이 주의를 주는 1순위는 옆교실에 방해되지 않게 아이들이 떠들지 않게 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조용하게 있어도 종일 웅웅 소리가 교실 위를 떠돌고 있었다.


나라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부족한 학교를 짓느라 서둘렀다. 동네마다 새로 지어진 국민학교가 문을 열었다. 우리 집 앞의 언덕너머에도 월산국민학교가 새로 문을 열었다.

학부모들은 어설프게 교실만 지어서 개교한 신생 학교보다는 좀 멀어도 아이가 다니던 전통 깊은 큰 학교에 계속 보내고 싶어 하는 풍토가 있었다. 새로 문을 연 학교의 교직원들이 등 하교 시간에 길목마다 지켜 서서 학군 관할 구역을 넘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붙잡아서 강제로 전학시켰다.


어느 날 초등생 3형제도 딱 걸렸다.

나는 6학년이라 다니던 학교에서 졸업하는 것으로 허용이 되었지만 4학년, 1학년 동생들은 가차 없이 수창국민학교에서 월산국민학교로 강제 전학생이 되었다.

세 꼬마들의 지난했던 긴 등하교 길도 한 학기 만에 짧게 끝났다. 지나 놓고 보면 나라에서 잘한 일이었다. 지금 초등 1학년에게 2km 넘게 복잡한 도시길을 걸어 학교에 가게 한다면 아동 학대로 고발될 일이다.


문득 내가 수창국민학교에 입학하던 날이 아득히 기억난다. 엄마손에 이끌려 왼쪽 가슴을 덮는 손수건을 매달고 줄을 섰다. (모든 아이들의 왼쪽 가슴에 코 닦는 손수건을 핀으로 찔러 매달게 했는지 새삼 웃음 짓게 한다.)  박담희 선생님, 나의 최초의 선생님 이름이다. 얼굴이 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키도 크셨다. 다음 해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는데 내가 3학년 때 공원에서 열린 글짓기 대회장에서 나를 보시고 내가 인사드리자 내 눈높이로 앉아서 어깨를 잡고 대견해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의 담임 선생님은 이덕순 선생님인데 박담희 선생께 나를 칭찬해 주셔서 그날 온종일 기분이 으쓱했던 기억이 있다. 꼭 다시 보고 싶은 선생님들을 잊고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부끄럽기도 하다.


한없이 길어질 초등학교 이야기를 줄이면서,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나는 학교 입학 전까지 한글을 몰랐다는 점이다. 아무도 미리 가르치려 하지도,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학교에 보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였다. 요즘 아이 키우는 얘기를 들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이전 21화 월산동 호남주택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