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픈 이야기
세월 따라 도둑질도 국민 소득 수준에 맞게 진화하고 발전한다. 보이스 피싱, 사이버 절도란 신조어 유행도 십 년이 넘어 이제 일상 용어가 됐다. 이웃 모두가 골고루 가난해서 일인당 국민소득 300달러 남짓이던 나라에서 벌어지던, 일상에서 사용하는 세간살이를 훔쳐가고 도둑맞은 얘기는 일인당 국민소득 삼만 불이 넘어선 시대의 시민이 돌아보면 웃프기만 한 유머일 것도 같다. 그 시절은 도둑맞은 집보다 훔치느라 애쓴 양상군자(梁上君子)에겐 몇 배나 더 힘든 때였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도둑도 맞고 사기도 당한다. 크던 작던 당하면 기분 나쁠 일이지만 성장기에 온 형제가 잠든 새에 도둑맞아보고 겪었던 감정 경험도 이제는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월산동 집에서 도둑맞은 해프닝도 조카들에겐 이야깃거리가 되는구나.
문패 도둑
월산동 집은 처음엔 전세를 들었지만 아버지는 곧 그 집을 샀다. 최초로, 아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 이름으로 등기가 된 집이다. 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멋진 문패가 대문 기둥벽에 걸렸다.
진한 회색 바탕의 대리석에 한자로 이름을 새기고 하얀 석고로 상감한 문패였다. 그 문패는 빨간 벽돌로 쌓은 대문 기둥을 문패 크기만큼 파내고 안쪽에 시멘트 몰탈로 단단히 붙여져 있었다.
그때는 온 사회가 가난해서인지 집집마다 좀도둑이 드는 사건은 다반사였고 일상의 물건을 도둑맞는 사고는 특별할 일도 아닌 이삼일 기분 상할 흔한 해프닝이었다. 너도 나도 그저 그렇게 가난하게, 소박하게 사는 사정이니 크게 값나가는 귀중품을 잃을 일은 없지만 막상 없으면 당장의 생활에 불편한 돈 안 되는 것들을 훔쳐가는 정도였다.
그런데 세상에나! 집 대문에 붙은 문패를 노리는 놈도 있었다.
문패를 붙인 시멘트를 끌로 쳐서 떼어내어 훔쳐가는 현장을 고등학생인 큰형이 목격하고 쫓아 나갔다.
도둑놈은 대리석에 새겨진 아버지의 묵직한 함자(銜字)가 새겨진 묵직한 돌을 들고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도둑놈이 실수를 한 것이다. 형은 달리기를 잘했다.
형이 초등학교 때 학교의 대표선수로 육상대회에 나가서 우리 가족 모두(나의 할머니, 너희들의 증조할머니도 모시고) 경기가 열리던 공설운동장에 응원하러 간 적도 있다.
동네 어귀를 벗어나 쫓기던 도둑이 곧 잡힐 듯하자 문패를 길옆 풀숲에 멀리 던지고는 도망쳤다. 형은 범인 추적대신 문패가 떨어진 곳에서 귀퉁이가 조금 떨어져 나간 문패를 찾았다. 크게 조각이 난 것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문패는 대문기둥 그 자리에 다시 붙여졌고 80년에 살던 단층집을 이층으로 다시 지으며 대문 위치를 옮길 때 골목을 향해 의젓하게 다시 붙어서 내내 대문을 지켰다. 70년대엔 남의 집 대문옆 기둥에 단단히 붙어있는 문패를 떼어가는 놈들도 있었다는 건 좀도둑계의 전설일 것 같다.
지난 세기에 대개의 집에는 주인의 문패가 붙어 있었고 집집마다의 문패는 나름의 품위와 개성이 있었다.
개인정보가 중요한 시대가 되어서인지 이제 문패를 단 집을 찾아보기 어렵다. 문패 대신 집집마다 관청에서 붙여준 번호가 붙어 있거나 건설회사가 붙여준 번호로 불린다.
거리의 간판은 세련되어 가지만 개인집의 문패는 어느 순간에 사라졌다.
재봉틀 도둑
부모님이 무슨 일이 있어 집을 비우신 날 (친목계에서 함께 여행을 가셨던 것 같다) 외가의 외사촌 큰누나가 우리 집에 와서 형제들을 돌봐 주었다. 하필 그날 야심한 밤에 도둑이 찾아왔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줄 알고 온 듯했다.
우리 집에서 훔쳐가봐야 돈이 될만한 물건이라고는 어머니의 재봉틀 밖에 없었는데 딱 그것만 없어졌다.
어머니가 의자에 앉아 발로 발판을 굴려 발판에 연결된 큰 바퀴와 다리 위에 놓인 재봉틀의 작은 돌림 바퀴를 가죽끈으로 활대처럼 연결해 돌려서 바느질을 하는 재봉틀인데 집안의 생활 재물 중에서는 가장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발판과 재봉틀 다리는 모두 무거운 무쇠 주물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의 단단한 나무 판에 얹혀 고정된 재봉틀은 브라더 미싱으로 당시 서민가정의 최고 인기 브랜드였다. 나는 그 재봉틀의 북을 몇 번이나 분해해 봤다. 중학교 1학년의 기술 과목 시간에 재봉틀 구조를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십 대의 형제들은 밤이면 곤히 잔다. 떠메어 가도 모를 때다. 옛날 집들은 도둑이 맘먹으면 얼마든지 침입할 수 있었다. 창문은 허술하고 미닫이문은 종이로 바르는 시절이었으니 문을 따고 들어오는 것은 기술도 아니었다.
도둑놈(들?)은 마음 놓고 재봉틀 다리와 재봉틀을 분리해서 돈이 되는 재봉틀만 훔쳐갔다. 다음날 아침에 놀라서 집구석구석을 둘러보니 도둑은 스스로의 흔적을 집안 여기저기 남겼는데, 얼마나 여유가 있었는지 담장 옆 석류나무 아래에 푸짐하게 대변을 쏟아놓고 갔다. 나중에 들었는데, 당시 도둑들은 아무리 급해도 도둑질한 집에 똥을 싸놓고 나가야 잡히지 않는다는 절도계의 징크스를 믿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오신 부모님은 사람을 해칠지도 모를 강도가 아니고 물건만 슬쩍하는 도둑이어서 다행이라 여기셨지만 당장에 필요한 재봉틀이 없어서 불편하고 속이 상하셨을 것이다. 새것을 다시 사려면 목돈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손에 익은 유용한 물건이 없어지면 상실감이 오래간다. 우리들은 한동안 다리 위 나무 판 위에 재봉틀이 놓여있던 휑한 구멍이 무섭고 허전했다. 기계가 사라진 재봉틀 다리를 볼 때마다 얼굴 모르는 험악한 도둑놈이 어둠 속에서 재봉틀을 떼가는 시커먼 몸짓이 보이는 것이다. 차라리 다리째로 몽땅 들고 갔으면 더 나을 뻔했다. 뭐든 잔해가 남으면 더 아리고 더 난감하다.
사정이 오죽이 안 좋으면 도둑질을 했겠냐마는, 옛날 살림 도둑은 자신이 얻는 작은 이익에 비해 남에게 몇 배의 손해를 끼쳐야 하는 가성비 낮은 직업이었다.
70년대에는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가지, 우물가의 양은 세숫대야, 부엌의 숟가락, 고장 난 라디오, 대문가에 매어 놓은 강아지마저 다 도둑질의 대상이었다. 물론 전봇대의 전화선, 전기선을 훔쳐가는 대담한 도둑도 많았다. 고물상에 팔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노리는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이 잘살아야 예절도 품위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은 대문 앞에 쌓아 놓아도 가져가지 않고 쓸만한 살림살이 도구도 내다 버리려면 돈을 내야 한다.
다녀보니 어느 나라나 비슷하게 발전하는데 도둑질도 그렇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