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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훈 Nov 16. 2023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뭔가. 나는 너를 볼 때 설렌다. 이것만으로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가. 아, 물론 네가 나를 볼 때는 설렘이 없어 보인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감히 네게 말하지 못한다. 나는 어떤 사랑을 하는가. 네가 모르게 한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느끼겠지. 이런 상황을 모를리는 없겠지. 이런 생각에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고 언젠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종종 했었다. 바보같이 먼저 다가설 용기는 없다. 왜? 멀어질 미래가 그려져서. 내가 사랑을 말하는 순간이 너와의 친구가 될 수 없는 때를 불러올 것을 알고 있다. 그 정도로 나는 너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가졌음에도 멀리 서서 지켜만 볼 뿐이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체하는 것인지 아무렇지 않게 연애에 대한 말을 꺼내고 이상형에 대해 얘기를 주고받는다. 음, 이상하리만치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이 된 기분이다. 누가 봐도 너에게 다정하며 얘기를 잘 들어주고 같이 있을 때 웃음이 많이 나는 것은 내가 아닌가. 이 정도면 네가 나에게 눈치를 주는 것일까-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 순간에 또다시 너와 나 사이에 선이 하나 생기는 듯한 말이 나온다. 서로를 응원해 주기를, 누군가 괜찮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서로를 먼저 떠올려 소개해주기를, 애인이 없으니 친한 친구인 둘이서 즐겁게 놀자는 말을. 너는 내가 너무 친하고 편해서 좋아한다. 그 감정이 결코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음을 알아서 어디 가서 이런 친구 못 만난다고 으스대며 잔을 칠 뿐이다.


 나는 너의 말 한마디에 매일 땅과 하늘을 오간다. 가끔 닿지 못할 기분이 들 때면 심해 깊은 곳에 빠져버린 기분까지. 그럼에도 미련하게 떠나지 못한다. 최근 영화 반의 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다. 여-'의미 부여하고 애정, 시간, 정성 부어 달려가고 대체 뭘로 어떻게 견뎠을까요?' 남-'삶의 중심 같은 사람이면 가능할 거 같은데.' 짝사랑을 하는 사람으로서 분명 남배우분이 말하던 대사가 더 감명 깊었어야 할 터인데 이상하게 여배우분이 하신 대사가 더 와닿았다. 정말 그 수많은 것을 부어가면서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한 채 어떻게 견디고 있는 걸까. 내가 사랑이랍시고 부어대는 감정과 행동들이 사실 너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못해 아프게 하는 원인은 아닌 걸까. 내가 아는 너는 영리하다. 이런 와중에도 나의 상처를 걱정할 것이며 그와 동시에 너의 감정을 감춰두고 나에게서 너를 벗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 마음 아픈 것은 내 삶의 중심이 너인 것은 분명하지만 너에겐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겠지. 네가 나의 사랑을 알고 있단 것도 알고 은근히 묻어두고 아무렇지 않게 친구사이로 지내고 싶어 하는 것도 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우리 둘 다 참 이기적인가 보다. 친구로 지내온 세월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생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오히려 네가 눈치 보게 만드는 멋대로인 내 마음과 이런 나를 알면서도 계속해서 친구로만 있고 싶어서 내 감정을 못 본 체 원하는 관계로 남기를 바라는 너.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이 이상으로 넘어설 수 없다니. 아무것도 없이 투명한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다가서려니 보이지 않던 유리벽에 박아 금이 갔다. 금이 간 유리에 비추는 너와 내 모습은 억지로 띈 미소가 군데군데 일그러져 있다.


 그래, 서로가 알고 있다. 우린 시한폭탄과도 같은 관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아직까지도 둘 다 먼저 선을 자를 용기를 내지 못해서, 먼저 가위를 들게 해주고 싶지 않아서 꽉 진 주먹을 맞대고 있을 뿐이다. 주변의 반응도 이제는 지쳤다. 나의 사랑을 빠르게 끝맺음하기를 바라는 이들과 너에게 매정함을 바라는 이들이 늘어난다. 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단 하나, '결국 너희는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라는 것.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제 멋대로 생겨버린 내 마음이며 너를 힘들게 만든 원인이라는 것을. 하지만 멋대로 생긴 마음이 썩 나쁘지 않음에 떠나보낼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어떡하나. 이제 나도 바라는 중이다. 차라리 네가 나를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 이 정도로 내 마음을 비추고 비추었는데 이제 와서라도 확실히 선을 그어주어서 미련 없이 포기하게 해 줬으면 좋겠다. 만약 우리 관계의 정리를 내 고백으로 시작한다면 그 끝에 결코 남을 수 없는 관계임에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정리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너는 그러지 못한다. 나에게 그런 쓴소리를, 마음을 아프게 할 말을 뱉을 수 있을 리 없다. 누구보다 오래 본 사이인 우리는 서로를 너무도 잘 알아서 무엇하나 쉬이 내놓지 못하는 멍청이들일뿐이다.


 내가 지기로 결심했다. 네가 나를 버리도록 만들어야겠다. 드디어 너를 포기할 용기가 생겼다. 그동안 못 본 체 외면하던 것을 두 눈을 감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입 밖으로 꺼내보겠다. 긴 침묵. 이것이 뜻하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너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지.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거절이 다가왔다. 그럼에도 끝끝내 너의 말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 모른 체하고 기다린다. 내가 말로 뱉어낸 것에 대한 대가로 너의 대답을 듣고 관계의 끝을 만들고 싶다. 얼마나 못난 놈인가. 시작은 내가 해놓고 끝맺음은 떠넘긴다니. 사랑의 시작조차 이기적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관계에서 자기 멋대로 품은 마음으로 상대에게 눈치 주고 불안감을 안겨주었고 스스로는 설렘과 행복을 챙겼다. 과연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이 맞을까. 너를 사랑하는 내가 좋아서 억지로 사랑이라 믿고 스스로에게 안정감을 준 건 아닐까. 이제 모르겠다. 끝내 너의 입에서 사과를 전하는 말이 나왔다. 이상하다. 속이 후련하다. 너는 아닐 텐데.


 우리의 관계를 정리할 때 네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제 친구도 못하겠네.'라고 아련히 말하던 모습.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네가 끝끝내 나를 밀어내지도 받아주지도 못한 채 떠안고 있던 고민이다. 함께 지내온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너와 나는 대체할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 쌓인 시간이 너에겐 내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을 시간이었고 나에겐 너를 사랑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똑같은 시간을 공유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인가. 분명 고백을 거절당한 것은 나인데 이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고 분노와 후회가 섞인 눈을 보이는 것은 너였다. 나는 끝끝내 사랑이란 말로 나의 바람을 포기하지 못했고 너는 끝끝내 우정이란 말로 너의 바람을 놓지 못했다. 내가 끊은 것은 우정이었고 네가 끊은 것은 사랑이었다.


 내 잘못이다. 나는 사랑을 하지 않았다. 너를 생각하지 않았다. 내 멋대로 삶에 끼워 넣은 너는 괴로워서 견뎌내지 못했다. 어떻게 이게 사랑인가. 다시는 못하겠다. 미안하다. 이 한마디로 너의 눈물을 뒤로하고 떠났다.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나 때문인데 책임만 넘겼다. 이 짧은 사과 한 마디에 어떤 감정이 들어있었는지 너와 나만 알고 있겠지. 주변에서 잘했다는 칭찬을 받는 것은 나였고 괜찮다고 위로를 받는 것은 너였다. 이상하다. 칭찬과 위로의 대상이 바뀐 기분이 든다. 지나온 시간에 너에게서 단 하나를 가져올 수 있다면 내가 넘겼던 책임을 도로 가져오고 싶다. 포기한 지금에서야 너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 때문에 아프지 않았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새어 나온다. 왜 이제 와서야.


 문득, 그런 생각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정말 너와의 관계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면 감히 이런 감정을 마음대로 가졌을까. 내가 정말 사랑했던 것이라면 너에게서 거절을 들었을 때 왜 후련했던 걸까. 사실은 속에 품고 있던 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면서도 불편해서, 토해내고 싶어서, 억지로 만들어낸 감정이라 너에게 떠넘기고 편안해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사랑한 너는 이제 없다. 나를 보며 밝게 웃어주고 함께 재밌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떠들던, 자상한 미소를 지으면서 장난스러운 농담을 꺼내며 서로 아무렇지 않게 만나고 보내던 시간, 이 모든 것이 없다. 나의 사과에 담긴 뜻만 생각했었다. 너에게 친구관계로 지내지 못하게 만든 것, 이런 말을 참지 못하고 전하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스스로의 욕심임을 알면서도 너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에 대한 사과였지만 너의 사과는 무엇일까. 아마 별 뜻 없이 그저 거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왤까, 그 속에 나에 대한 원망들이 느껴졌던 것은.


 짝사랑은 하지 않겠다. 짐을 넘기지 않겠다. 나도 받아내겠다. 이타적인 마음으로 시작하는 사랑은 지독히 이기적이고 이기적으로 시작하는 사랑은 오히려 이타적이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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