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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Feb 27. 2021

11살: 그게 부끄러웠나 보다

 엄마가 겨우 구한 일자리를 태만으로 잘리고 다시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으려 동분서주하던 때였다. 엄마는 이혼 이후 늘 정신이 없었고, 늘 피곤했으며, 늘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다 떨어진 쌀을 채우는 것을 까먹었다. 오전에 집에 먹을 쌀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언니와 나는 어떻게 할지 고민을 했다. 회사 면접을 보러 나간 엄마가 바빠서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는 평소처럼 늦은 저녁에나 집에 돌아올 것 같았고, 집에 남아있는 라면이나 과자는 없었다. 우리는 고민하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할머니 댁까지 가기로 했다. 버스비가 없어서 버스를 탈 수는 없었고, 둘 중 덜 배고픈 사람 한 명만 직접 걸어가기로 했다. 내가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가겠다고 했다. 아침을 거르고 30분 거리를 걸어가는 길에 해가 중천에 떠서 배고프고 더웠다. 힘든 걸음으로 겨우 할머니 댁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집에 안 계시고 할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할아버지께서 밀감을 챙겨주시고 쌀을 비닐봉지에 담아 주셨다. 버스비도 함께 챙겨주셔서 버스를 타고 돌아와 얼른 밥을 짓고 언니와 동생들과 밥을 간장에 비벼 김치와 함께 먹었다.

 또 어느 날은 밥솥에 말라붙은 밥 덩어리가 있어서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쌀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른밥에 물을 말아먹자고 한 언니를 따라 딱딱하게 굳은 밥을 먹고 소화가 안 돼서 토하기도 했다.


 언제까지 애들은 두고 되지도 않는 구직을 하러 다닐 거냐며, 여건이 안 되면 정부 지원을 받으라고 할머니가 부추겨서 엄마는 결국 마지막 자존심을 굽히고 동사무소에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게 되었다. 가진 재산과 소득이 수급자 조건에 부합해서 우리 집은 수급자 가정으로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엄마는 동사무소의 취업 지원을 받아 간병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지원이 있었다.


 제일 크게 느꼈던 것은 아동급식카드가 나온 것이었다. 이 카드가 있으면 배고플 때 우리 동네에 한 군데 있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먹을 수 있었다. 집으로 배달 주문을 할 때 '급식카드로 계산할게요' 하면 배달하는 아저씨가 카드기를 가지고 와 우리가 주문한 만큼 돈을 긁어갔다. 짜장면은 이전에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음식이었다. 달고 기름진 맛에 중독되어 처음에는 언니랑 동생들과 짜장면만 주구장창 시켜먹었다. 한 달에 인당 3만 원씩 지원이 되었는데 네 남매가 한 달 동안 6끼씩 먹을 수 있었다. 급식카드에 돈이 들어오면 조절을 잘 못 해서 며칠 동안 뺀질나게 짜장면을 시켜 먹고, 카드의 돈을 다 써버리면 나머지 끼니는 라면을 끓여먹거나 초코파이 같은 과자로 배를 채우거나 했다. 나중에는 적당히 며칠씩 간격을 두어 시켜먹기도 하고 짜장면 소스를 남겨뒀다가 밥에 비벼 먹는 방식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짜장면을 계속 시켜먹다 질릴 때가 되니 메뉴판의 탕수육에도 눈이 갔다. 감히 가난한 우리가 비싼 음식인 탕수육까지 먹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망설이다가, 나중에는 짜장면에 질릴 대로 질려서 탕수육도 시키자고 제안하는 남동생을 따라 탕수육을 함께 시켜먹기도 했다. 탕수육을 시켜 먹는 것이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탕수육을 시키면서 아동급식카드를 내밀 때 괜히 배달 아저씨의 눈을 피하기도 했다. 어쨌든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니 밥을 굶는 일이 줄어 좋았다.


 우리 동네 중국집 옆에는 놀이터가 있었는데 보통 학원에 가지 않고 할 일이 없는 우리 남매가 자주 나가서 놀곤 했다. 한 번씩 옆 건물 중국집 딸아이도 나와서 놀았는데, 그 아이한테서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을 느꼈다. 매장에서 급식카드로 음식을 시켜먹은 적은 없었지만, 매번 급식카드로 배달시켜 먹으니 그 아이는 내가 가난한 걸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오면 슬금슬금 피해 다른 놀이를 하곤 했다. 하지만 놀이터 공간을 함께 쓰는 시간이 긴 만큼 조금씩 조금씩 사이가 가까워졌다. 점심때쯤 아이가 배고프다고 자기네 중국집으로 들어가 버리더니, 조금 뒤 나와서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같이 중국집으로 들어가니 아주머니께서 해물 우동을 챙겨주셨다. 배고파서 맛있게 먹었지만 앉아 있는 자리는 정말 불편했다. 암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 야금야금 우동을 먹는 저 아이의 입에서 갑자기 '너희 집 가난하지, 못 살지' 같은 말이 나올 것 같아서 두근두근 했다. 다음에도 같이 밥 먹자고 데려갈까 봐 나는 놀이터에 놀러 가는 날을 점점 줄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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