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세 작품으로 만나는 페미니즘 백래쉬
지난주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세일러문>과 <소녀혁명 우테나>이야기에 이어 페미니즘 백래시를 다루는 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고급스럽게 포장된 덕질 노트의 주인공은 <돌아가는 펭귄 드럼>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연결되는 질문
'우리가 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다면', 가부장제를 뒤집을 수 없다면 가부장제에 억눌린 여성과 소수자, 혹은 맨박스에 갇힌 인간들은 어떻게 이 사회에서 생존전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소녀혁명 우테나>에서 제기된 한계에 감독 스스로가 답변한 작품 <돌아가는 펭귄 드럼>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혁명 자체를 성공시키는 거겠지만...)
<돌아가는 펭귄드럼> 역시 '가부장제, 소수자, 연대'라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줄거리를 따로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왜냐면... 이 작품은 줄거리를 얘기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사실 저도 무슨 줄거리인지 몇 번 돌려봐도 모르겠어요. 대신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함께 알면 좋은 배경지식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Intro: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모티브
<돌아가는 펭귄 드럼>에서 몇 가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티브가 있습니다.
1995년과 지하철이라는 모티브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개구리군 도쿄를 구하다>
이 두 가지 모티브를 조합하면 일본 버블경제 붕괴만큼이나, 일본 사회에 큰 상흔을 남긴 하나의 사건이 도출됩니다.
바로 1995년 지하철 역사에 사린가스를 살포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옴진리교'의 테러사건.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당 테러사건의 진상을 파헤친 수필 '언더그라운드'를 집필한 작가입니다. 이를 통해 유추하자면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소스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옴진리교, 그리고 펭귄드럼은 우테나에서 잠깐 언급된 ‘실패한 혁명’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차근차근 함께 살펴볼까요?
1장: 거대담론의 붕괴를 상징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하면 저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옴진리교, 달리기, 그리고 노마드적 삶을 구가하는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그는 '혁명의 실패'를 상징하기 위해 <돌아가는 펭귄드럼>에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주요한 모티브로 인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혁명을 부르짖는 페미니즘, 공산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을 해체시킨 개인주의의 등장이 있었기에, 하루키가 일본에서 누구보다 성공한 소설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과 수필을 철저히 개인주의적 경험에 기반하여 전개할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국가주의나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 담론에 반발심을 지니고 있다고 밝히곤 합니다. 때문에 하루키 자신의 성공은 그의 뛰어난 문체나 필력만큼, 국가와 이데올로기가 세분화된 취향과 아이디어로 해체되고 개인주의로 철저히 전환된 우리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죠. 다만 이런 개인주의의 부작용이 하나 있습니다. 개인이 원하던, 원치 않던 가족 제도나, 국가, 혹은 이데올로기 등 구심점을 만들던 거대 담론이 붕괴하면서 철저히 소외되고, 외로운 인간을 낳은 것이죠.
그리고 소외된 인간들에겐 언제나 '당신에게 가치를 주겠다.', '있을 곳을 주겠다.'는 존재 증명의 유혹이 동반되는 법입니다. 그렇게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들이 안 좋은 방향으로 응집한 결과, 1995년 '옴진리교' 테러가 발생합니다.
2장: <돌아가는 펭귄드럼> 속 옴진리교를 은유하는 장치들
('몰라도 아는 척' 27화로 옴진리교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옴진리교
일본의 종교 테러리스트 집단. 일본의 에반게리온을 비롯해 1990년대 후반 일본 문학과 여러 콘텐츠들에서 옴진리교를 일으킨 비극을 빼놓곤 당시 사회의 감성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소외가 만들어낸 사회의 벽이 거듭해서 쌓인 결과, 극단적인 종교에 빠진 이들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 독가스 테러로 죽음을 몰고 갔습니다. 높아지는 취업문턱과, 사회에서 쓸모를 찾지 못한 소외된 이들이 느낀 단절감은 이들을 '옴진리교'라는 극단 종교단체가 건넨 달콤한 '자신이 있을 자리'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소외감을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선 펭귄과 상자라는 메타포를 통해 전달합니다.
'육지 동물도, 바다 동물도 아닌 것이, 극지에서 밖에 살지 못하는 마치 어디에도 끼지 못할 것 같은 동물이네요.'
하나의 펭귄과도 같은 인간들은 각자 '상자', 벗어날 수 없는 사회란 시스템 안에 갇혀있습니다. 서로 팔을 뻗어도 연결될 수 없는 고독한 새장 속. 그런데 이 상자를 부수자, 즉 혁명하자고 부추기는 인물이 <돌아가는 펭귄 드럼>에도 한 명 있습니다.
와타세 사네토시, 이름을 한자 그대로 옮기면 진리(眞悧)라는 이름을 지닌 이 사내는 소외된 사람들을 배제하는 사회를 '혁명'하고자 '기가'라는 조직을 조직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상자'를 부수는 것. 그것이 자신들의 생존전략이라고 작중에서 늘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상자 안에 갇혀있어. 벗어날 수 없는 상자 속에서 인간은 선택받아야만 하지. 선택받지 못한 아무것도 아닌 자들은 투명해지고 말아.’
사네토시와 기가는 시스템에 선택받지 못한, 혹은 소외받은 인간들로,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상자 자체를 파괴함으로 사회를 혁명시키려고 한 겁니다. 이들이 혁명의 원동력으로 삼은 것은 우테나와 달리 '동정심'이나 '사랑'아닌 사회에 대한 순수한 증오나 결핍, 저주와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마치 '인형'과 같이 좋게 포장한 폭탄을 빌려 사회를 파괴하고자 했으나 역시나 실패하게 됩니다. 증오나 결핍은 만인을 포용할 수 있을 만한 혁명의 동기가 될 수 없으니까요.
인물의 이름이나 사상, 행적 모두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와도 유사한 이 인물과 무라카미 하루키, 두 가지 모티브를 합쳤을 때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 비로소 보입니다.
3장: 실패한 혁명 뒤 <생존 전략>은 무엇인가?
누구나 불합리한 일을 겪고 나면 변화나 혁명을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거대 담론이 해체되고, 개인주의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소외된 이들이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뒤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우테나'의 혁명은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사네토시가 일으킨 비극에 가까운 혁명은 '증오의 연쇄'가 가진 한계로 인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문제가 하나 남습니다. '혁명에 성공할 수 없다면, 소외된 이들은 상자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를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선 옴진리교와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유한 메타포를 사이에서, 비교적 직접적인 상징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상자'라는 은유로 상징되는 사회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자에 의해 선택을 받는 이들. 이들은 각자 상자 안에서 '사과'를 발견하게 됩니다. 발견한 사과를 베어 먹음으로써 갈증과 배고픔을 해소하고, 살아남을 수 있죠.
반면에 선택받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사회로부터 소외받아, 굶주리고 존재감이 옅어지면서 결국 '투명해'지는 이들입니다. 이쿠하라 감독이 굳이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소외된 이들의 소식은 사회에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기억되지도 않으며 말 그대로 '투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생존전략'의 선택. 사과를 온전히 혼자 차지해서 살아남거나, 이 상자라는 시스템을 부셔서 밖으로 나가거나. 여기서 사네토시는 선택받지 못한 자였기 때문에, 소외된 이들을 이끌고 이 상자라는 시스템을 혁명(파괴)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두 형제가 선택한 '생존전략'은 조금 다릅니다.
바로 자신의 생존본능을 거스르고, 사과를 나누는 것. 상대방이 투명해지지 않도록 자기희생으로 존재와 삶을 나누는 것. 이 '혁명이 실패한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함께 생존할 전략은 무엇인가?'라는 우테나 이후의 대답을 몇 년에 걸쳐 감독이 정리한 메시지 마치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 정리해 답변받는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이는 백인 중심의 페미니즘,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의견 차이로 실패했던 2세대 페미니즘이 소수자와, 자신과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에 대한 관심에 기반한 '교차 이론'과 제3세대 페미니즘으로의 발전까지 연상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Out Tro: 여전히 의문부호가 생기는 <생존 전략>
그런데도 여전히 의문부호는 하나 남습니다. <소녀혁명 우테나>의 '어드레센스 묵시록'에서 내린 결말이 조금은 도피적이고 불완전해 보였던 것처럼 <돌아가는 펭귄드럼>이 제기하는 '생존전략' 역시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대답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기희생에 근거한 사랑' 듣기엔 정말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만인이 실천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요즘 인터넷 게시판 어디를 들어가도 혐오와 증오로 가득 찬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 가족도 아닌 이들이, 가족으로 만난 인연을 바탕으로 서로 자기희생과 사랑을 베푸는 모습을 여럿 보여주었지만, 이것이 혁명에 실패한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생존전략>이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감독은 스스로 대답한 질문에 다시 한번 새로운 답변을 내놓을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로 만나는 페미니즘 백래시' 그 마지막 대답을 담은 작품 '사라잔마이'입니다. 사라잔마이는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의 스타일로 대표되는 '소수자 2인 운명 공동체', '미적인 외형을 지는 여성 캐릭터 주인공'이란 법칙을 파격적으로 깨버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거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 내놓은 답과,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 스스로 선호하던 스타일마저 어떻게 파격적으로 바꾸었는지 다음 시간에 이 주제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