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라소라빵 Oct 06. 2022

혁명이 실패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1_소녀혁명 우테나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세 작품으로 만나는 페미니즘 백래쉬,

지난번 이야기, 겟 아웃과 놉의 감독 조던 필을 중심으로 푼 현대사회와 미디어의 신화에 이어 두 번째 감독을 소개드립니다. 오늘은 조금 더 딥(Deep)한 서브컬처 작품으로 준비해왔는데요. 바로 세일러문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감독으로 유명한 이쿠하라 쿠니히코! 그리고 주제는 '페미니즘과 백래쉬'입니다.


그럼 오늘의 고급스럽게 포장된 덕질 노트 2탄을 시작해봅니다!


서두: 실패한 혁명 뒤의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실패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는 '실패한 혁명으로서 페미니즘,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페미니즘 운동을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오해와 편견을 살 수 있는 발언인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지만, 혁명의 실패가 그 시도가 지닌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음을 함께 기억해주시며 그 근거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어떠한 혁명을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필수조건이 다음과 같은 2가지라 생각합니다.


1) 구체제를 파괴적일 정도로 뒤엎는 것

2) 새롭게 세운 체제를 지속하는 것


이를테면, 과거의 프랑스 대혁명이 왕권을 타도하고 3일 뒤에 다시 왕권이 복귀되었다면,  혁명이 과연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삼일천하일 뿐입니다. 때문에 최근 거세진 백래시를 마주하고 있는 페미니즘은 자신들이 목표로 하던 가부장제의 전복 및 '혁명의 성공'에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 그런 고민과 이야기를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작품 3개 <소녀혁명 우테나>, <돌아가는 펭귄드럼>, <사라잔마이>로 풀어볼 겁니다.

오늘 주로 소개 될 작품들

3개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각자 내놓은 답이 페미니즘의 변천과 역사와 엮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줍니다.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쿠하라 감독의 필모는 페미니즘이라는 혁명의 등장, 그리고 혁명의 실패, 그 혁명이 실패했음에도 우리는 그 유산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하는가? 그런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시간 날 때마다 쭉 이어보시는 걸 추천드리고 싶어요.  우선 이 감독의 성향을 알아보기 위해 가장 유명한 작품, 세일러문부터 소개해봅니다.


INTRO: 세일러문과 LGBT, 감독의 성향을 대표하는 초기작
원작자는 아니고 애니메이션 시리지 감독

 마법소녀물의 조상 격인 세일러문. 이쿠하라는 ‘세일러문 R’이라는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감독을 맡았습니다.(사실 세대가 어긋나서 세일러문을 제대로 본 적은 없습니다. ) 그는 원작을 파격적일 정도로 재해석했는데,  원작의 인물들에게 LGBT, 즉 소수자의 정체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는 90년대 한국만큼이나 보수적이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보기 드문 시도로, 어느 작품에서도 보기 힘든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면서 세일러문의 성공을 이끌었습니다. 대표적인 캐릭터가 바이 섹슈얼 정체성을 지닌 넵튠과 우라노스.

 한국과 미국에선 사촌이라는 관계로 순화되서 들어왔는데, 이 두 캐릭터는 일종의 레즈비언적 운명 공동체로 묘사됩니다. 이 두 캐릭터가 얼마나 레즈비언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는지,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었을 적 미국 레즈비언 사회에선 ‘내 사촌이 되어죠’이런 말이 잠시 고백 대사로 유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 트랜스 젠더 정체성을 지닌 피쉬아이 등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런 변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가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세일러문의 원작자인 타케우치 나오코. 나오코가 바라본 세일러문은 일종의 '모성애의 화신'이었기 때문에 이쿠하라의 변주를 좋게 볼 리가 없었죠. 원작자와 이쿠하라는 큰 갈등을 겪게 되고  그 결과 이쿠하라의 감독직 하차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의 초기작만 보더라도 그의 관심사에 대해서 유추가 가능합니다. 그는 80년대 미국 내에서 성행했던 페미니즘 운동과, 막 등장한 개념은 소수자 성과 LGBT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상업적인 의도이든 아니든 그것을 자신이 감독하는 애니메이션에 녹여낼 정도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 정도 배경지식을 지닌 채로, 감독의 진정한 첫 작품 <소녀혁명 우테나>로 넘어가 봅시다.


2장: 그 혁명은 성공했는가? 소녀혁명 우테나

소녀혁명 우테나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엔 2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와 <신세기 에반게리온>.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세일러문 감독직에서 하차한 이쿠하라 감독이 휴직기간 동안 방영된 일본 사회의 세대 정서를 관통한 애니메이션이자, 감독이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결정하는 데 큰 영감을 준 애니메이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작품이 바로 <소녀혁명 우테나>이고요. 에반게리온이 기성세대가 만든 버블경제 붕괴로 젊은 세대에게 부여된 사회의 짐을 신지나 아스카 등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캐릭터로 표현했다면, 소녀 혁명 우테나 역시 기성체제에 대한 나름의 문제의식을 제기합니다. 그런데 소녀 혁명 우테나가 본 시선은 조금 다릅니다...

축하는 개뿔, 오메데토 할 시간에 혁명하자

에반게리온처럼 기성세대로 부터 이 시대에 존재해도 된다는 긍정과 위로를 받는 ‘오메데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구세대가 만든 불합리한 체제를 혁명하자, 뒤집자'라는 수준까지 발전합니다. 그리고 <소녀혁명 우테나>가 혁명하고자 한 것은 바로 페미니즘이 목표로 하는 가부장제도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시대적 배경이 나옵니다. <소녀혁명 우테나>가 방영된 시기는 1998년. 미국 내에서 일어난 레디컬 페미니즘이 거센 백래시의 파도를 맞이하고, 미국 내에서 메카시즘과 내부 담론 분열로 인해 페미니즘 운동의 추진력이 많이 약화된 시기입니다. 즉 이쿠하라 감독은 이미 '혁명의 실패'를 두 눈으로 목도한 상태에서 우테나를 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파괴적일 정도로 구체제를 뒤엎는 것. 그것이 혁명

그런데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봅시다. 혁명의 정의에 대해서요. 우리가 선풍기가 불편하다고 에어컨으로 바꾸거나, 가스레인지를 인덕션으로 바꾸는 정도를 혁명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혁명이란 산업혁명 이전 말을 중심으로 한 인프라가 자동차가 등장한 후 모두 해체되고 파괴되는 것. 이를테면 이제 말을 키우는 목장, 마부, 마차 이런 인프라들이 깡그리 무너지고 고속도로나 물류시스템 같이 새로운 체제가 등장해 구체제를 파괴할 정도의 변화가 있는 것.  이런 것들을 우리는 혁명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왕권을 무너트린 프랑스혁명, 자유시장의 질서를 해체하고자 하는 공산주의 같은 것들 뒤에 우리는 혁명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이런 혁명의 특징을 기억하고 우테나를 함께 바라봅시다.



우테나엔 혁명의 대상인 가부장제를 은유하는 메타포가 넘쳐납니다. 일단 작품 줄거리를 조금 소개해봅시다.

작품의 무대인 오오토리 학원은 그야말로 높은 '가부장제'의 성이다

 작품의 배경인 오오토리 학원은 성벽에 둘러싸인 하나의 세계, 즉 하나의 사회입니다. 이곳엔 안시라는 소녀가 있는데, 이 소녀가 수수께끼의 힘을 가지고 있어요. 작중에선 이를 ‘세계를 혁명하는 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힘을 얻기 위해선 듀얼이라는 칼부림을 통해 경쟁자들을 쓰러트리고 안시(여성)를 신부로써 소유해야 합니다.

신부를 '소유'해야 힘을 얻을 수 있는 사회

참가자들은 각자 결핍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 듀얼에 참가를 하죠. 이 학원에 막 전학을 오게 된 소녀 우테나는 안시(여성)가 물건처럼 다뤄지는 모습에 동정심을 품게 되고, 안시를 불합리한 시스템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스스로 왕자를 자처해 듀얼에 참가하게 됩니다. 공주는 공주를 구할 수 없으니 왕자가 되어 공주를 구하려고 하는 스토리. 이것이 소녀혁명 우테나의 큰 줄기입니다. 듀얼에 참가하는 캐릭터들도 마치 가부장제의 악습을 여러 파편으로 나눈 것 같은 설정인데, 자신보다 뛰어난 남자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남성 캐릭터, 자신의 레즈비언적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세계를 혁명할 힘을 원하는 캐릭터, 여성을 착취하여 권력을 얻는 남성. 맨박스에 갇힌 남성 등.


그럼 우테나는 결국 이런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캐릭터들을 모두 물리치고, 안시를 해방시킬 수 있었을까요? 즉 우테나의 혁명은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체제를 반복하는 것은 혁명의 수단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1990년대에 미국 페미니즘 운동이 거대한 백래시를 맞이했던 것처럼 외적으로는 아주 처절하게 실패해요. 그런데 이는 당연하게도, 주인공 우테나의 혁명은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자가 되어 공주를 구한다는 것은 체제를 다른 모습으로 반복할 뿐이죠.


3세대 페미니즘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지적하듯 일종의 왕자님을 자처하는 일종의 젠더수행은 가부장제를 더욱 공고히 할 뿐, 파괴할 혁명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동시대 1980년의 2세대 페미니즘이 '여성 동지'라는 젠더에 국한된 경험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다양한 인종과 계층을 포섭하지 못해 결국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한 페미니즘의 변천과도 동일합니다. 결국 우테나는 왕자를 동경했지만, 왕자가 될 수 없었고, 왕자가 되어봤자 시스템이 정한 규칙을 되풀이할 뿐, 안시를 해방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오히려 안시에게 배신당해 등 뒤에서 칼에 찔리는 연출이 등장하기까지 하죠. 페미니즘 백래쉬 인해 결국엔 서로 '자매'라고 지칭하던 여성 내에서도 서로 계급과 인종, 의견 차이와 분쟁으로 갈라졌던 것처럼요. 그런데 감독은 자신의 메시지 하나를 남깁니다. '혁명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혁명도 그럴까요? '


3장: 실패한 혁명도 그 유산은 남는다
성(가부장제) 안에서 주체성을 잃었던 안시는 우테나의 혁명 시도로 자신의 주체성을 되찾는다.

우테나의 혁명은 실패했지만, 안시에게 한 가지 변화를 남깁니다. 학원, 즉 가부장제란 시스템에선 해방되기 위해선 왕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시스템에서 나가야 된 다는 것. 그저 듀얼에서 남성들의 소유물, 그리고 권력유지 수단에 지나지 않던 안시는 우테나의 혁명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스스로 학원 밖을 나가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가부장제의 소유물에 불과하던 캐릭터가, 주체의식을 갖고 시스템 밖으로 나가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죠. 외적인 혁명은 실패했지만, 마음의 변화는 이뤄낸 셈입니다. 2세대 페미니즘이 전한 성과이자, 실패한 혁명의 값진 교훈이기도 하죠. 


극장판 격 후일담에 속하는 <어드레센스 묵시록>에선 주체성을 되찾은 안시가 결국 우테나와의 유대를 통해 결국 가부장제 시스템에서 빠져나가려는 이들의 방해공작을 전부 물리치고, 진정한 사랑(해방)을 이루는 장면까지 연출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2세대 페미니즘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혁명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여기서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결국 제2세대 페미니즘은 '실패한 혁명'에 가깝습니다. (성공했다면 그 이후에 페미니즘은 세상에 필요하지도 않았겠죠.) 감독은 극장판에서 혁명의 성공을 이상적으로 그리긴 했지만, 과연 인간 한 개인이 기존 시스템을 뒤엎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요? 소수의 왕족과 귀족, 다수의 시민, 이런 대결구도조차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수많은 희생과 실패가 필요했습니다.  혁명의 성공이라는 것이 역사 속에서도 손꼽히는 만큼, 인간 개인이 어떤 시스템 내에서 성공적인 혁명을 일으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나 이데올로기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 혹은 나노사회라는 키워드가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오늘 사회에서는 더욱이요.


다음 주 주제

혁명이 성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시스템을 뒤집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요? 감독은 그 대답을 '돌아가는 펭귄드럼'이란 작품에서 내놓습니다. 펭귄드럼은 소녀혁명 우테나에서 얻은 주제의식을 계승하는 작품인 셈이지요.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이야기는 또 다음 주에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