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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소라빵 Oct 25. 2022

혁명이 실패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3_사라잔마이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세 작품으로 만나는 페미니즘 백래쉬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의 <소녀혁명 우테나, <돌아가는 펭귄드럼>에 이은 세 번째 시간입니다. 이쿠하라 감독이 내놓은 가장 최근의 해답이자, 가장 이질적인 작품. 처음엔 당황했지만, 감상을 마무리한 후에는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 바로 <사라잔마이>입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생존본능을 거스른 자기희생과 사랑'으로 함께 생존해 나갈 것을 은유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희생을 욕망을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현대인들이 기꺼이 수행해 나갈 수 있을까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감독이 다시 한번 정리해 내놓은 작품. <사라잔마이>입니다. 


물론 펭귄드럼에서도 각자의 욕망을 원동력으로 삼아 입체적인 캐릭터는 많았는데요. <사라잔마이>에선 서로 충돌하는 욕망이 조금 더 직설적인 상징으로 보여집니다. 각 주인공들이 가진 욕망이 어떻게 부딪히고 서로 관계를 맺어나가며 생존할 수 있었는지,  <사라잔마이>로 함께 그 답을 들어보시죠!



INTRO 사라잔마이 속 메타포 <상자>
누가 봐도 아마존을 비유한 듯한 박스

작중 1화부터 벌여지는 사건은 주인공 3명이 가지고 있던 상자가 서로 뒤바뀐 것입니다. 이 상자에 적힌 로고는 누가 봐도 아마존을 비튼 듯한 '카파존'이라는 작명. 언제든 원하는 상품을 주문할 수 있고, 그것을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실어 나르는 현대사회를 겨냥한 은유입니다. 수많은 욕구들이 이렇게 사회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현대사회는 비로소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유지가 될 수 있죠. 그 욕망을 현대사회가 무한히 긍정하고 있는 것만 같지만, 남에겐 들켜서는 안 되는, 숨겨야만 하는 욕구 또만 남몰래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상자 안에 숨겨진 주인공 삼인의 '욕구'처럼요.

친구와 유대, 혹은 동성애적 사랑을 간직하고 싶은 소년의 상자 안에는 어릴 적 친구와 교환했던 축구 팔찌가

가족을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소년의 상자 안에는 총이

그리고 동생이 좋아하는 아이돌로 여장을 해서라도(?) 동생과의 유대를 지키고 싶어 했던 소년의 상자 안에는 여장 세트가 들어있습니다. 이들이 가진 각자의 욕구는 사회에서 다소 평범하다고 볼 수는 없는 욕구로, 남에게 보여줘서는 안되는 욕망이 담긴 각자의 상자가 우연한 사고로 섞이게 되면서 <사라잔마이>는 그 출발을 알립니다.


그런데 이들의 욕망이 담긴 상자들. 이쿠하라 감독의 다른 작품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바로 펭귄드럼에서도 나왔던 '상자'. 즉 현대 사회의 시스템입니다. 현대 사회는 그야말로 욕구로 인해 돌아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작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선 서로 다른 욕구가 충돌하며, '사랑에 근거한 자기희생'을 가로막는 듯 연출되었죠.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답, 감독은 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준비했을까요?



1. 욕망의 폭로 과정 <사라잔마이>

<사라잔마이>는 욕구로 인해서 사건이 발생하고, 욕구를 이해함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매화 에피소드가  다음과 같은 과정을 따라 전개되기 때문이죠.


1. 작중 악의 세력이 욕망을 가진 이들의 시체를 이용해 '욕망'이 뒤틀려 변한 괴물을 만들어 낸다.

2. 이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주인공 세 명이 갓파로 변신을 하고 '사라잔마이'란 의식을 시행한다.

3. '사라잔마이'로 괴물의 욕망이 밝혀지며 성불한 후, 의식의 참여한 한 사람의 욕망 역시 폭로-누설과 전송-공유되는 과정을 거친다.

4. 관객들은 충격에 빠진다.(여러 의미로)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사라잔마이'라는 의식은... 조금 더럽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진입장벽이 될 정도로요.) 직설적으로 묘사하자면 괴물의 똥구멍을 후벼 파, 괴물이 인간일적에 가지고 있던 욕망을 담은 기관을 적출하고, 괴물을 성불시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 다소 추잡해 보이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문득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수치심과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마주했을 때 시작 가능한 '대화'라는 상호이해 과정입니다. 


괴물을 퇴치하는 사라잔마이의 의식은 '폭로-누설과 전송-공유' 총 3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1) 먼저 괴물의 똥구멍을 후벼 파 욕망이 담긴 '시리코다마'라는 기관을 적출해 냅니다. 

이때 주인공 세 명은 괴물이 가지고 있던 욕망에 대해 폭로함으로, 그 욕망의 실체를 알 게 되죠. 그런데 여기서 주인공들이 알게 되는 것은 괴물의 욕망뿐만이 아닙니다.

아마... 이 작품의 가장 큰 진입장벽이자 묘미

2) 괴물을 퇴치하기 위한 대가로 의식에 참여했던 세 명 중 한 사람의 욕망도 함께 누설되고, 전송되는 바람에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욕망마저 서로에게 공유되고 맙니다. 앞서 얘기했던 '동생을 위해 여장을 하고 있다.', '친구를 동성애적으로 사랑하고 있다.' , '가족을 위해 범죄를 저질러 가며 손을 더럽혔다.' 등 사회에서 인정받기 힘들고, 남에게 누설당하고 싶지 않은 욕망을 들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의식이 하나 끝날 때마다, 괴물의 후장을 후벼 파는 것과 같이 다소 수치스러운 고통이 동반되고 나서야 이들은 비로소 서로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마칩니다. 상대방이 끝까지 숨기고 있던 욕망을 서로 알게 됨으로 말이죠. (물론 거기서 발생한 감정의 무게는 각자 알아서 감당해야 했지만요.) 


이런 과정을 종합해 보았을 때 ‘사라잔마이’란 자신의 욕망을 꺼내 나누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괴물 역시 자신의 욕망을 사라잔마이를 통해 배설하고, 공유했기에 죽은 사람이 성불할 수 있었던 셈이죠. 

사라잔마이가 끝날 때마다 보이는 벤다이어 그램

그런데 이 의식을 잘 관찰하다 보면, 사라잔마이가 하나 끝날때마다 보이는 벤다이어 그램이 있습니다. 각 3개의 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시작하지 않는다.’, ‘이어지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다.’ 이 원을 연결해보면 즉 '커뮤니케이션이 시작하지 않는다면 서로 이어지지도 않고, 이어지지 않는다면 끝나지도 않는다.' 즉 대화와 인연이 가지는 의미를 정말 직설적으로 제시합니다. 그 대화가 비록 상대방의 똥구멍을 후벼 파야 되는 다소 괴로운 과정이 될지 라도, 우리는 대화를 시작해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관계를 맺어야 이어지고, 이어짐은 결국 아픈 이별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도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죠. 


즉 이 작품은 '사랑에 근거한 자기희생'을 전적으로 부정할 것만 같았던 욕망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욕망을 어떻게 서로 누설하고, 전송하며, 공유하여 관계를 시작하고 잇고, 끝맺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 주인공들 각자의 욕망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았던 것과 반대로, <사라잔마이>는 오히려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죠. 이전 작품과는 사뭇 다른 관점으로 욕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2. 욕망은 우리를 연결시킬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돌아가는 펭귄 드럼>에서 제시된 의문. 욕망을 가진 인간이 과연 사랑에 기반엔 자기희생을 이룰 수 있을까? 펭귄드럼에선 남은 엔딩을 마무리하느라, 혹은 그에 대해 미처 준비되지 못하였던 그 답이, <사라잔마이>에선 조금은 따스하고, 희망적인 시선으로 우리의 욕망을 비춰줍니다. 바로 주인공 삼인의 선배 격인 인물들이자,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에 실패한 앞선 세대를 먼저 비춰줌으로 말이죠.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작중에 등장하는 이 순경들은 사실 '갓파'로 주인공들의 선배, 혹은 앞선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과거 <소녀혁명 우테나>나 <돌아가는 펭귄드럼>처럼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어른들로, 때문에 악의 제국의 수하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박살 났고 그 이유가 '욕망'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이 욕망에 대해 취하는 자세 역시 <돌아가는 펭귄드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욕망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얼마든지 이기적으로 될 수 있고, 다른 욕망으로 갈라 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타인에게 밝히거나, 공유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욕망이 사회에서 인정받기 힘든 욕망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그런데 이들이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 '욕망'이 없었다면 서로를 향한 관계는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다시 <사라잔마이>가 완료될 때마다 등장하는 도형으로 돌아와, 우리는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계가 시작되며, 그 관계가 이어짐에 따라 서로의 욕망을 조율하거나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 그것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을 때, 혹은 서로의 욕망이 너무 상이할 때 관계의 끝을 고하게 됩니다. 즉 욕망이 없다면 관계는 시작할 수도 없고, 시작하지 않은 관계는 이어질 수도 없으며, 끝을 맺을 수도 없습니다. 당연히 관계가 시작되지 않는다면 '타인을 위해 내가 희생을 하겠다', 라는 펭귄드럼에서 도출된 생존전략에 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OUT TRO 새로운 생존전략 '욕망을 이어라'

때문에 <사라잔마이>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욕망을 연결시켜라'라고 얘기하죠. 작중에 등장하는 괴물이 된 사람들과, 주인공 삼인방의 가장 큰 차이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괴물이 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반사회적인, 혹은 이해받지 못할 거라 생각한 욕망을 혼자 끌어안은 결과, 펭귄드럼에서 소외된 사람들처럼 결국 사회에서 잊혀졌습니다. 괴물이 <사라잔마이>로 성불당하면 그 존재와 기억이 사회에서 지워지는 것이 이를 의미합니다.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도 어찌 보면 사회적으로 용납받지 못할, 혹은 인정받지 못할 욕구를 지니고 있었고, 결국 최후의 최후에 그 욕망으로 인해 모든 유대를 놓고 사회 저편으로 사라질(소외될) 뻔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구원한 단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이들은 '사라잔마이' 의식을 통해 서로의 욕망을 공유하고 연결시켰다는 것.

남정네들의 시원시원한 알몸쇼는 그냥 보여주기가 아니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닙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거나, 진실을 알게 되어 다투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서로의 욕망을 이야기하였기에 끝에는 연대하고, 서로의 욕구를 이해하여 공동의 전선을 만들어 나가 불투명한 미래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자기희생이 욕망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면, 각자의 욕망을 교차하여 이해하고, 함께 연대하는 운명 공동체로 제시한,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새로운 해답. <사라잔마이>의 주인공이 이쿠하라의 전작들과 달리 3인으로 구성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둘로, 즉 이분법적으로 구성되는 세계는 너무 자기 완결적입니다. 한쪽이 빠지면 완성되지 않고, 한쪽이 한쪽을 위해 희생해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도한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완결된 관계는 우테나와 안시 중에서 우테나가 '왕자'의 역할을 맡는 것, 그리고 우라노스와 넵튠 사이에서 우라노스가 '왕자'의 역할을 맞는 것 처럼 기존 체제(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젠더 수행적인, 혹은 구체제를 답습하는 결과를 보여주기도 하고요.


이런 과정은 흔히 '3세대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교차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 역시 있습니다. 서로의 다양한 욕구와 배경, 사회적 차이를 이해하고 연결, 즉 교차시키는 것. 그것으로 서로 다른 욕망과 욕구를 지닌 이들을 연대시키고, 더욱 거대하고 악한 욕망의 제국(작품에서 묘사되기론 족제비)에 대항할 힘을 얻는 것. <소녀혁명 우테나>가 2세대 페미니즘을 모토로 한다면 <사라잔마이>는 시간이 흐른 만큼 다른 답을 내놓은 작품이었습니다. 페미니즘이 3세대로 거쳐오면서 그 범위를 다양한 욕망을 지닌 소수자들까지 확대시키고, 새로운 운동의 동력을 얻은 것처럼요.


시작은 난해했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였어...

거의 한달이란 시간 동안 이쿠하라의 작품들을 다시 돌려보며 골몰했던 시간도 여기까지 입니다. <사라잔마이>역시 아름다운 작품이었지만 여기서 제시된 대답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제시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쿠하라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페미니즘의 변천과 혁명의 시작과 진행과정을 계속해서 따라가는 감독은 2021년 이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백래시와 국수주의, 자민족 중심주의가 스멀스멀 부활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대해 어떤 생각과 영감을 던져줄까요?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며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세 작품으로 만나는 페미니즘 백래쉬' 시리즈는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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