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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Oct 21. 2023

자기다움의 회복

기획된 글을 밀어내며

네번째 글과 다섯번째 글 사이에

발행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참 잘 키워진 기획자의 자아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마주했다.

그녀는 브런치북을 위하여 쓰는 열편 글의 후반부까지

촘촘히 잘 설계된 판으로

나를 내몰고 있었다.



흥미로운 기승전결의 한 가운데에

기술과 트렌드를 뭉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그런 MZ의 모습 쯤으로

본인을 포지셔닝해주었다.

(트렌드를 읽는 기획력 하나는 끝내준다.

그러나 쓰는 자아에게는 경계의 대상이다.)




기획자 나누리가 기획한 글의 후반부. (진지한 와중에, 애호박찌개 튄 자국이 눈치 없다.)



그녀는 내게 다섯번째 글에는

입으로 쓴 글을 손으로 퇴고한 내용을 덧붙이고

여섯번 째, 일곱번 째에

인공지능으로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놓으라 했다.

그리고 인간다움으로의 회복을 주장하는

훈훈한 맺음을 그려냈다.





그런데 그게 이 브런치북에서

내가 하고싶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매끄러운 기승전결을 쓰고싶어서

나를 꺼내보이려는 결심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낯선 이들 앞에서

반찬거리가 되는 말도 잘 늘어놓지 않는 내가

나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미디어의 매대로 던지는 실천은

보다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메시지 앞에 떳떳하기 위해서

글의 꿈을 품은 아홉 해 동안

스스로를 얼마나 괴롭혔던가.


매끈함을 경계할 때 비로소

지독하게 진실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될 수있다는 것이

비죽비죽 튀어나온 자아를 깎으면서 얻어온 전리품이 아니던가.




이토록-완벽한 아침에

균열을 다짐한 나의 움직임은

인공지능이나 유투브 유행의 시류에

어떻게 얻어타보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글의 호흡을 끊고

좋아하는 수필가 임경선의 최근 인터뷰를 꺼내 읽었다.



머리가 아닌 마음이 시키는 걸 써야해요.
지금 세상이, 환경이, 트렌드가 이렇다고, 젊은 독자들이 좋아한다고 맞추면 안됩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확신에 찬 이야기를 꼭 써야 해요. 그래야 A4용지 100장을 채울 수가 있습니다.


생각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에 대해 정리한다는 거죠.
회피하지 않겠다는 태도이기도 해요.
그러면서 스스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습도 보게 되고, 인정하기 싫은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생각이 소재가 됩니다.

- 임경선 작가, Longblack 2023년 인터뷰에서



내가 열렬히 아끼는 나의 글들은

나를 발가벗겼을 때 나왔다.



나는 기획된 글을 내려놓고,

내가 나를 까발리기로 마음먹었던

그 아침으로 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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