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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아샘 Oct 24. 2022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용기

 누군가가 나 대신 말을 해주겠지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불합리한 제도가 눈에 들어올 때가 많다. 문제는 그런 정책들이 바뀌지 않고, 오랜 시간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누군가 건의를 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하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처리되지 못할까. 내가 말을 안 해도 누군가가 대신 말해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어떤 일을 바꾸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때로는 상급자에게 찾아가서 불편한 말도 해야 한다. 그런 탓에,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 대신 말을 해줄 거라는 생각만 하면서 말이다. 삼삼오오 모여서 뒷말하는 건 부담 없고 편하지만,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데는 큰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주먹구구식 보결 배정

 이전 학교에서, 학년 부장을 맡았다. 당시 학년 내의 보결 배정 업무는, 학년 부장 교사가 맡아서 했다. (여기서 보결 업무란 담임교사가 사정이 생겨서 수업을 못 하게 될 때, 대신 수업해 줄 누군가를 찾아서 임시로 그 수업에 배정하는 일을 말한다) 물론 학년 업무를 총괄하는 학년 부장 교사가 그 일을 당연히 하여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결 배정을 할 때, 같은 학년 내에서만 배정할 수 없다. 학교의 모든 선생님 수업을 파악하며, 직접 배정해야 한다. 학년 부장이 모든 교사의 수업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리고 여섯 명의 각 학년 부장 교사가, 같은 업무를 한다는 것도 굉장히 소모적이었다.

 학년 부장 교사가 보결 배정을 하라는 업무 지시만 있을 뿐, 따로 보결 배정의 지침도 없었다. 규정이 없는 탓에, 각 학년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선생님을 배정했다. 교사 대부분이 갑자기 다른 반 수업에 들어가는 것을 꺼렸기에, 보결 배정하기가 매우 껄끄러웠다. 정말 배정할 사람이 없을 때는, 평소 친분이 있는 선생님을 찾아서 개인적으로 부탁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각 학년 부장 교사들의 상황이 비슷했기에, 결국 교내에서 마음이 좋고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선생님들만 주로 보결 수업을 들어가게 되었다. 일부 선생님들만 반복적으로 보결 수업에 들어가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이지 못했다. 사석에서 다른 부장 선생님들께 말했다.

 “교내에 규정이 없다 보니, 자꾸 마음 좋은 일부 선생님께만 부탁하게 되네요. 다른 분들도 다들 그분께만 부탁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요. 그런 일이 반복되니 참 민망하고 죄송해요.”

옆에 있던 다른 부장 교사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네. 각 학년 부장 교사들이 각각 따로 보결 배정을 하니, 업무가 원활하지 못한 것 같아요. 교내에서 한 분을 따로 정해서 보결 담당으로 지정하거나, 그게 안 된다면 명확한 업무 지침이라도 마련했으면 좋겠어요.”

“맞아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해요.”     


 괜한 소리

 부장 회의 시간에, 공식적으로 건의를 했다. 사전에 다들 내 의견에 동의했기에, 자신 있게 내 의견을 펼칠 수 있었다.

“학년 부장들이 개별적으로 보결 배정을 하다 보니, 체계적으로 배정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별도로 교내의 보결 배정을 할 선생님을 두거나, 명확한 규정을 마련해서 일을 처리했으면 좋겠습니다.”

 학교 관리자 중 한 분이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해온 방식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데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요? 보결을 배정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들 잘 처리해왔으니, 그냥 지금처럼 잘해 봅시다.”

“그렇지만.”

 예상과 달리 내 의견이 반영되지 못했다. 몹시 당황스럽고 민망했다. 조금 전 사석에서 내 의견에 동조해주었던 선생님들을 슬쩍 쳐다봤다. 그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준다면, 관리자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내 시선을 피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무도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니,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건의했던 내 의견은 단 1분도 안 되어 의미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회의가 끝나고 교실에 돌아와서,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단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부당한 상황에서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내었는데 아무도 동조를 해주지 않아서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보결 배정을 하면서 다들 나처럼 곤란을 겪었을 테고, 그들을 대표해서 의견을 낸 것인데. 왜 아무도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을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가만히 있을 걸, 괜한 소리를 했다고 후회를 했다.

 그 사건 이후로는 부장 회의 시간에 이제는 다른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거니까. 이제는 자꾸 불만만 토로하는 교사로 낙인찍히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건의를 해봐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특수교사의 용기

 내가 속한 단체에서 주최하는 교사 수련회에 참석했다. 주제 강의 시간에, 특수교사로 근무하는 한 선생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았다. 그의 이야기는 몹시 충격적이었다. 

 한 관리자가 공식적으로 그 선생님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 한여름에도 특수학급 교실은 에어컨을 틀지 말라는 것이었다. 소수의 아이만 오가는 특수교실에서 에어컨을 트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당함에 부장 교사에게 건의도 해 보고, 직접 찾아가서 따져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얼음을 얼려서 아이들에게 대어 주고, 시원한 물을 자주 마시게 하는 등으로 도움반에 오는 장애 학생들과 더운 여름을 버텼다. 당시 동료들이 자신의 부당한 일에 함께 목소리를 내주지 않아서, 무력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로도 그 관리자는 교내에서 여러 가지 부당한 행동을 했다. 그의 힘이 무서워서 다들 침묵했지만, 그중 한 선생님이 용기를 내서, 인권위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교육청에서 학교로 조사를 나왔지만, 동료 교사들은 다들 별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부당함을 말하면, 이후에 관리자에게 피해를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들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니,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선생님만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게 되었다. 

 특수 선생님도 어떻게 해야 할지 한동안 망설였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기로 했다. 동료 교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자신이 당한 부당함도 함께 말한 것이다. 그 일이 도화선이 되어서, 결국 그 관리자는 중징계를 받고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동조해주는 한 사람

 그 상황에서 교사 대부분이 침묵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다수가 침묵하는 상황 속에서, 혼자만 피해를 감수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한편으로는 처음 목소리를 낸 선생님과 그 의견에 동조하며 힘을 실어준 특수교사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그 두 선생님이 없었다면, 학교의 문제는 조용히 묻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선생님만 큰 곤경에 빠졌으리라.

 지금 내게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본다. 물론 가장 먼저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직 그럴 자신은 없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목소리를 내봤지만, 긍정적인 피드백을 얻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고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하며 가만히 있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차선의 선택

 누군가가 처음 부당함을 말했을 때 그 말에 동조해주고 힘을 실어주는 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가 힘겹게 말을 꺼냈을 때, 그 의견이 그냥 묻히지 않도록 힘을 실어주는 일 말이다. 작은 목소리로 동조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용기 있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하나둘 더 생기지 않을까. 그러면 학교가, 더불어 세상이 한 걸음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리라.

 항상 최고의 선택이나 최고의 선택을 하면 좋겠지만, 언제나 그럴 수는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완벽하게 대처하지 못했다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을 하고자 한다. 묵묵히 차선의 선택을 하다 보면, 용기 있게 최고의 선택을 할 날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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