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사례 1) 영어 책 읽어준 적 없는 엄빠
A의 엄빠는 아이가 어릴 때 영어책을 읽어준 적이 한 번도 없다. 한글책도 많이 읽어주는 편은 아니었고, 책과 같이 딸려오는 CD나 테이프로 듣게 하는 것을 더 자주 했었다. 그때는 "엄마표 영어"라는 말 자체도 없었고, 영어 교육에 모두가 지금처럼 열을 올리던 시기도 아니었다. 그래서 A의 엄마는 영어 교육을 딱히 생각한 적이 없고 아이의 교육 자체에 큰 욕심이 없었다.
이 가족은 아주 대화가 많은 가족이다. 책 읽는 시간보다 대화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영화 한 편을 보면 집에 오면서, 그날 저녁을 먹으며 두세 시간 어렵지 않게 그 영화 내용만을 가지고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저녁 뉴스 한 조각을 가지고 새벽 세시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날 지각을 하는 일도 많았다. 토론을 좋아해서 돌아가며 토론 주제를 정하고 일요일에 식탁에 앉아 준비한 주제를 가지고 한두 시간 정도 토론을 했다.
A의 부모는 아이가 보내달라고 하기 전까진 학원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A와 A의 남동생 둘 다 아주 자유롭고 한가한, 조금은 심심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둘은 사교육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으며 야간 자율학습을 해본 적도 없고 심지어 둘 다 수능을 보지 않았다. A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공부나 성적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어떤 그림을 자세히 그리기보단 현재의 건강 문제에 집중했다. 전날 늦게 잔 아침에 아이가 일어나기 싫다고 칭얼대면 A의 아빠는 피곤하면 조금 더 자고 2-3교시에 가거나 오늘 하루는 학교를 쉬라고 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 주변에서 입시 이야기가 들려올 때쯤부터 A는 “자신은 절대 한국에서 수능을 보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A는 엄마표 영어도 한 적이 없고, 스스로 원해서 초등학생 때 다닌 영어 글쓰기 학원 말고는 딱히 영어 학원을 다녀본 적도 없다. 하지만 A와 A의 동생은 10대 시절 영어 말하기, 듣기, 쓰기, 문법을 모두 완성했다. 둘 다 어렵지 않게 미국 대학을 들어갔고, 지금도 영어를 외국어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서 편하게 사용한다.
Case "A"
A의 엄마는 영어 필기체를 잘 쓴다. 알파벳이라는 낯선 글자의 첫인상은 마법같은 엄마의 필기체였다. A도 어릴 때부터 영어 필기체를 연습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좋아하게 됐다. A의 엄마 아빠는 영어를 할 줄 모르고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팝송을 너무 좋아해서 자주 틀어놓았다. 그리고 A가 어릴 때부터 영어 영상을 보여줬다.(집안일을 할 때 칭얼대지 말라고 보여줬다고 한다.) 지금 A는 그 영상을 본 기억도 없지만 어릴 때 자주 듣고 봐서 그런지 영어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보통 11살~12살 때쯤 아이들은 처음 스스로 음악을 선택한다고 한다. 이 시기에 A도 스스로 듣고 싶은 음악을 선택했다. 그때 A가 선택한 음악은 팝송이었다.
A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신기한 경험을 했다. 평소와 같이 학교에 걸어가며 음악을 듣던 중, 갑자기 영어가 들린 것이다. 너무 명확하게 들려서 그 가사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신기한 것은 영어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이해된 것이 아니라, 그냥 영어 자체로 들렸다는 것이다. 이후 A는 스스로 영어 노래를 이용해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공부라기보단 그냥 다이어리에 좋아하는 영어 노래 가사를 적고 해석을 옆에 적어서 예쁘게 꾸미는 것이었다.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있던 A는 글 쓰기와 책 읽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A는 꾸준히 영어 글쓰기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매주 영어 에세이를 A4용지 한 장 분량 써가야 하는 숙제가 있는 학원이었는데, A는 그 숙제가 즐거웠다. 영어가 쉬워서라기 보다는 글쓰기가 좋아서 즐거웠다. 가끔 잘 쓴 글이 학원 벽면에 걸리면 A는 그게 너무 자랑스러웠다.
A는 영어 문법공부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영어 문법 학원을 가본 적은 있지만 선생님 말을 안 들어서 한 달 만에 선생님이 지쳐 못 가르치겠다며 포기했다. A는 영어 문법 용어를 전혀 몰랐다. 영단어 스펠링도 잘 못외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A는 모르는 영어 노래를 듣고 바로 따라 부를 수 있었지만 'library'의 스펠링은 외워지지 않아서 항상 틀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한글책은 좋아했지만 딱히 영어책 읽는 것을 좋아하거나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Case "A의 동생"
사교육 학원이 항상 나쁜 건 아니다. A의 동생은 A와 똑같이 자유로운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똑같은 것을 들으며 자랐지만 A만큼 영어를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도 영어 시험은 자신 없어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중 집 근처에 영어 애니메이션을 보고 대사를 그대로 따라 하는 수업을 집중적으로 하는 영어 학원에 관심을 보여 다니게 되었다. 가족들 앞에서 성대모사를 하면서 웃기는 걸 좋아하던 아이에게 아주 찰떡인 학원이었다. 기수제였던 그 영어 학원을 졸업할 6학년 때쯤에 영어 말하기 대회 시험에 나가서 전국 1등을 수상했다.
중요한 포인트
A는 영어를 좋아하고 유학에 일찍부터 관심이 많아 중학생 때 한 달 정도 아일랜드로 여름 캠프를 다녀왔다. 두 번째로 뉴질랜드에 갔을 때는 동생과 같이 갔다. 그 한두 달 동안 A와 A의 동생은 영어가 많이 늘었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 둘 다 영어를 쓰는 해외에서 한 달, 두 달 정도를 산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둘 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한국에 돌아와 검정고시를 보고 스스로 준비해서 미국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을 들어가기 전 둘 다 미국 고등학교를 1년 이상 다닌 경험이 있었다.
결론
A는 영어를 좋아했고, A의 동생은 영어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어책 읽기 없이도 성인이 된 지금 영어를 아주 잘한다. 이들은 동시통역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잘하고, 영어를 외국어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받아들인다.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는,
화목하고 대화가 아주 많은 가정
어릴 때부터 보여준 영어 영상
팝송을 듣고 부르는 엄빠
중학교 시절 한 달씩 다녀온 해외 유학 경험(A:두 번, A의 동생:한 번)
A의 경우 어릴 때부터 영어를 좋아함
A의 동생의 경우 영어 학원 운이 좋았음
A와 A의 동생이 영어를 받아들이는 시기나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둘의 성격이 다른 것도 있었겠지만, 둘 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음악/영화)에 영어를 더해서 배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부모는 영어책은 한 번도 읽어준 적이 없지만 아이들에게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전혀 주지 않았고,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영어 교육에 크게 관여하지 않고 선택권을 아이에게 주었다.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Leo Tolstoi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톨스토이의 명언을 좋아한다. 행복의 공식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게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A는 나, A의 동생은 나의 동생이다. 나는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정만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가정에게 행복이 얼마나 쉽거나 어려운지는 알 수 없다. 어려울 때도 단단한 기둥이 우리 가족을 절대적으로 붙잡았다. 나는 가정의 행복과 높은 자존감이라는 특권의 렌즈를 두 눈에 장착하고 살아왔다. 그 렌즈로 본 세상은 내 바로 옆자리 친구들의 세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행복이 당연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나는 간혹 무심한 말로 상처를 주기도 했다. 꼭 “불행”은 아니더라도 “행복하지 않음”이 기본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내가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평화롭고 안전하고 행복한 가정이 내 영어뿐 아니라 인생 전체를 쌓아가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4학년 때쯤 엄마 아빠는 우리에게 포커를 가르쳐주며 말했다. “우리는 4인 포커하려고 너네 낳았어.”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말을 하며 엄빠는 키득키득 웃었다. 둘이서만 하는 포커보다 네 명이서 하는 포커가 훨씬 더 재미있다는 건 대학 때, 신혼 때 친구들과 항상 포커를 치며 시간을 보냈으니 당연히 아는 사실이었다. 아빠는 10시 퇴근 후에도 무조건 한두 시간 우리와 몸을 부딪히고 땀 흘리며 놀아주는 아빠였고, 엄마는 우리에게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떤 대학을 가야 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엄마였다.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보드게임이나 포커를 하거나 토론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꼭 생일 때가 아니더라도 한 번씩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가족이기도 했다.
누가 영어 공부 팁을 물어보면 나는 '많이 듣고 따라 하기'와 '단어 외우기'만 하면 어떤 언어든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단어 하기도 귀찮으면 일단 매일 듣기부터 열심히 하라고 한다. 걸을 때 듣고, 잘 때 듣고, 먹을 때 듣고, 일단 무조건 들으라고. 많이 듣지도 않고 언어를 배운다는 건 터무니없다. 듣기도 전에 그 언어의 책을 읽으라는 것도 이상하다. 물론 그렇게 영어를 익힌 사람들도 있겠지만 모국어를 익히는데 듣기, 말하기를 하기 전 읽기부터 하는 사람은 없다. 글자를 배우기 전 부모가 읽어주는 책의 경험은 아이에게 ‘읽기’가 아니라 ‘듣기’와 ‘보기’이다. "엄마표 영어"에서도 아이가 혼자 읽기 전 더듬더듬 읽어주는 엄마 아빠의 역할이 먼저 필요하다고 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영상을 보여주는 게 걱정된다면 영어 음악을 들려주면 좋을 것 같다. 아이들을 위한 동요일 필요 없다. 일단 유튜브에 들어가서 엄마 아빠 귀에 듣기 좋은 음악을 먼저 찾는다. 그리고 그걸 부모가 들으면 된다. 그러면 아이도 듣게 되니 그렇게 들려주면 된다. 영어 교육을 위한 노래를 굳이 찾지 말고 엄빠 폰에 이미 저장된, 엄빠가 좋아하는 영어로 된 음악을 들으면 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요나 디즈니 음악도 틀어줘야 하겠지만 애들이 어떤 노래를 틀어달라고 하지 않을 때는 부모가 좋아하는 팝송을 부모가 즐겁게 들으면 ㅇㅋ
스트레스 없이 꾸준히 듣고 따라 하는 것, 영어에 대한 좋은 기억을 기둥으로 나와 내 동생은 영어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