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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어디 어디 가봤어?

첫 번째 유럽 - 체코에서의 일주일

by 글한송이

오늘이 며칠이지? 어느 순간 전 벌써 졸업반을 앞둔 학생이었어요. 준비된 것도 없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정말 나이만 먹은 스물 셋 대학생이요. 이미 친구들은 방송 작가로 활동하며 방송 프로그램에 하나둘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라, 막막했죠. 나는 어떡하나, 무얼 해야 하나. 전 방송 작가가 될 자신이 없었거든요. 퇴근이 없는 직업으로 유명하기도 했고, 직업 특성상 있는 어마어마한 기싸움, 쥐꼬리만한 월급까지. 사실 다 핑계예요. 그냥, 제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망친 거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변한 건지, 다 내려놓고 싶었어요. 열심히 한 덕분에 조기 졸업이 가능했고, 남들보다 일찍 사회에 뛰어들 수 있었지만, 무서웠어요. 그러면서 자존심도 상했던 거 있죠? 끝장도 못 보고 도망가는 스스로한테요. 그래서 제대로 '도망'쳐보자 생각했어요. 이왕 현실 도피 하는 거, 해외로 떠나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곳이 어딜까 지도를 펼쳤는데, 지구본이 아니라 그런지 유럽이 제일 멀게 느껴졌어요. 앞으로 세 번, 가고 싶은 나라는 다 가겠다는 각오로 EU국가를 찬찬히 살폈고, 모아놓은 자금으로 당장 갈 수 있는 국가는, 체코였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유럽 여행, 체코에서의 일주일이 시작되었죠.

Hi, Prague.

멋지게 여행하고 싶어서 매일 도서관에 가서 여행 서적을 읽고, 블로그 서칭하면서 정보를 긁어 모았어요. 체코 여행지를 담은 방송 프로그램도 질리도록 봤던 거 같아요. 비행기를 타서도 프라하에 관한 이야기들을 휴대폰에 다운로드 받아 계속 읽었습니다. 간단한 인삿말도 준비했어요. '도브리덴'. 지하철을 탔을 때, 외국인이 '안녕하세요?' 하고 말 걸면 괜히 더 도와주고 싶은 그런 심리를 이용할 생각이었거든요. 정말 도움이 되긴 해요. 만원 트램에 갇혀 티켓 펀칭을 못 하고 있다가 현지인 분이 도와주셔서 '데꾸이(고맙습니다)'하고 말했더니 트램 안에 있던 모든 현지 승객들이 제게 자리까지 양보해줬으니까요. 그렇게 기분 좋은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체력이 정말 저질이에요. 체육 수행평가 만점,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반 대표 계주 선수 출신인 게 무색하게 말이죠. 대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일주일에 이틀을 몰아 자고, 나머진 계속 밤 새워 과제에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지도 교수님이 엄하셨고, 과제는 매주 쌓여만 갔어요. 방송부 작가로 활동하면서 써야 하는 글들은 또 얼마나 많았다구요. 팔에 신경성 장애가 온 것도 이때부터였을 거예요.

체코 픽업 차량

각설하고, 그래서 제 체코 첫 날 일정은 호텔에 무사 입소 후, 뻗기였습니다. 해외 나간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땐 고등학교에서 홈스테이 어학연수를 보내줬던 거라 잘못될 일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체코는 무서웠어요. 픽업 서비스를 이용해서 호텔에 도착했고, 유쾌하신 기사님 덕분에 비행기에서 한 멀미도 싹 달아났어요. 그리고 곧장 잠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엔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숙소를 나설 수 있었어요. 꾸물거리는 날씨도 좋았어요. 제가 떠났던 때가 8월이니까, 한국은 엄청 더웠을 거잖아요? 여긴 무진장 시원했거든요. 바츨라프 광장, 구시가지 광장, 하벨시장. 분명 하루에 한 곳만 갈 생각이었는데, 프라하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담했고, 다 이어져 있어서 하루만에 다 둘러보고 말았습니다. 그것조차도 즐거웠어요. 이건 비밀인데요, 전 곧 비가 올 것처럼 흐린 날에 이유도 없이 깔깔대고 웃는답니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곳도 가봤는데, 음, 글쎄요. 제 입맛엔 너무 짰어요. 참고로 전 소금 간을 해먹지 않는 입맛을 가졌어요.

바츨라프 광장

숙소를 잘 잡은 탓에 하벨시장까지 도보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길을 탐색하는 데에 집중했어요. 내가 만일 이 지역, 이 동네 사람이라면 과연 어떤 길을 이용할까, 궁금했거든요. 그런 거 있으시죠? 나만 아는 개구멍 같은 거. 그래서 이리저리 돌아다녔어요. 배에서 천둥 소리가 들릴 때쯤에야 멈췄습니다. 벌써 저녁이더라구요. TESCO라고 가장 큰(?) 대형 마트가 있어요. 우리나라랑 비교해보면, 이마트가 얼추 비슷하겠네요. 거기서 구경도 하고, 요깃거리도 사왔어요. 호텔 1층엔 레스토랑도 있었고, 맞은편엔 유명한 식당도 있었는데, 그건 여행객을 위한 거잖아요. 전 그런 느낌을 잊고 싶었어요. 외부인이라든지, 잠깐 머물렀다 갈 어느 사람이라든지 하는 거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면, 졸업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옥죄어와서요. 그래서 간단히, 길거리 음식을 구매해 숙소 테이블 위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휘양찬란하게 세웠던 계획은, 관광 하루 차에 무려 세 곳을 구경한 덕분에 완전히 틀어졌어요. 이제 갈 곳은 프라하성이 있는 신시가지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아예, 유명 관광명소를 다 돌아다니고, 남은 나흘 간은 즉흥 여행을 해보자 결심했죠. 그게 또 여행의 묘미니까요.

트램

트램을 타고 프라하성으로 향했습니다. 날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어요. 두근대는 제 심장을 더 뜨겁게 달궜죠. 도심 가운데에 있는 성이라니, 얼마나 멋있겠어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웅장한 성곽은 눈을 즐겁게 만들었어요. 아, 국제학생증을 지참해서 입장료도 할인 받았어요! 여권이랑 학생증을 보여줬더니 직원분이 동일인물 맞냐며 장난을 쳤는데, 여권 사진 정말... 태워버리고 싶어요. 아무튼 티켓마저 예쁜 프라하성 입장권을 들고 발길이 닿는대로 걸었습니다.


다른 여행객분들의 SNS를 보면, 프라하성 안에 있는 커피숍 방문이 인증샷이던데, 전 가지 않았어요. 길을 따라 쭉쭉 내려오면서 보이는 전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커피는 생각도 안 나더라구요. 황금소로, 존 레논의 벽 등등 프라하에 가면 꼭 봐야 할 곳들도 빼놓치 않고 구경했죠. 이날은 굴뚝빵으로도 유명한 '뜨르들로'를 먹었는데, 정말 거짓말 안 하고 말씀드릴게요, 이후에 체코를 한 번 더 방문했는데, 그 이유가 이 빵 때문입니다. 진짜 맛있어요. 아이스크림을 넣어 먹어도 맛있고, 오리지널 빵만 먹어도 맛있어요. 왜, 에펠탑 보러 프랑스 가고, 축구 경기 보러 영국 간다고 하잖아요. 체코는 다른 거 다 빼고, 뜨르들로 든 채로 카를교에서 프라하성 야경을 보는 거면 말 다 한 거예요.

뜨르들로, 핫도그, 젤리

저한텐 여행 징크스가 있어요. 여행하는 국가의 관광지 중 한 곳은 무조건 공사중이라는 건데요, 이 징크스는 체코에서 시작됐습니다. 2017년 8월에는 천문시계가 한창 공사로 가려져 있을 때였어요. 아쉬워서 천문시계탑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어요. 언젠가 다시 방문할 이유를 하나 만든 셈이었죠. 프라하 천문시계(Prague astronomical clock)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만들어졌고, 현재까지도 작동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 시계래요. 천문 눈금판에는 해와 달, 정시가 되면 조각품들이 움직이는 사도들의 행진, 그리고 달력 눈금판이 특징이죠. 사도들의 행진을 꼭 보고 오래서, 10분 전부터 광장에 서서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떼지 않았는데요, 죽음을 의미하는 12개의 조각품이 노랫소리에 맞춰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근데, 그러고 끝이라서 여기저기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답니다. 전 짧아서 좋았는데 말이에요.

천문시계탑

전 굳이 말한다면 불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요, 절에 간다거나 하진 않아서 무교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믿음이라는 성스러운 마음가짐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진 않으니까요. 절도, 성당도, 교회도, 다 좋아합니다. 믿음으로 깨달음에 정진한다는 건 멋진 일이니까요. 그래서 유럽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성당들도 매우 인상 깊었어요. 역사적인 건물들이라 더 가슴에 와닿았던 걸까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푸드덕대며 날아가는 것조차 감동으로 다가왔죠. 맑은 하늘, 뜨거운 태양 아래 생긴 시원한 그늘, 선선한 바람까지. 신나서 방방 뛰어다니다가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다 꿈이라고 착각할 만했어요. 천국, 천당, 극락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거라 상상해봅니다.

구시가지, 비눗방울이 돌려준 동심

자, 계획표에 있던 장소들은 모두 한 번 이상 돌아다녔어요. 이제 정말 즉흥적인 여행이 시작됐습니다. 처음으로 들어간 곳은, 스파이더맨이 있던 어떤 상점이었어요. 강남역 큰 빌딩 1층에 롯데월드를 세운 건가 싶었죠. 회전목마도 있었고, 장난감도 많았어요. 미끄럼틀도 타 봤는데, 나이에 안 어울리는 짓은 하지 말란 계시인지, 엉덩이가 아파서 혼났네요. 직원들은 친절했어요. 여행객들이 붐비는 와중에도 힘든 기색 없이 방긋방긋 웃고 계셨거든요. 헐크, 아이언맨, 스파이더맨과 한창 사진을 찍자, 배가 고파져서, 옆 동네로 옮겨갔어요. 웬걸, 세상 젤리란 젤리는 다 모아놓은 '젤리가게'가 있었습니다. 무게에 따라 가격이 책정되는데, 개구리, 해골 등등 관상용으로도 징그러운 젤리부터 매운 고추 맛 젤리, 예쁜 딸기 모양 젤리 등 종류가 다양했죠. 아직 학생 신분인 저에겐 많은 자금이 없었어요. 아쉬운 마음은 뒤로 하고, 정말 먹고 싶은 녀석들 몇 개만 구매했어요.


사실, 체코는 프라하와 체스키크롬로프라는 두 지역이 유명하죠. 하나는 수도이자 관광지로, 다른 하나는 작은 마을이자 동화같은 건축물로. 둘 다 가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급하게 온 것도 있었고, 여행 때문에 머리 아프기도 싫었거든요. 한국, 현실에서 도망친 건데, 그 과정도 힘들면 너무 슬프잖아요. 특히나 남들 다 하는 휴학 한 번 없이 내리 달려 조기 졸업 대상자까지 된 처지라 일탈이 필요했던 때 말이에요. 장소를 넓히는 대신, 음식을 맛깔나게 먹어보자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대담하게, 꼴레뇨를 먹기로 했어요. 이게 양도 많고 짜서 여럿이 모여 먹는다고들 하는데, MBTI 검사 결과 극I에 해당하는 제가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밥을 먹는 건 불가능이었죠. 동행은 고사하고, 당당하게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어 메뉴판을 보는데 이게 절 달래주는 거 있죠. 마치 '넌 먹을 자격이 있어.'라고 말해주는 거 같았어요. 당당하게 꼴레뇨와 흑맥주를 주문했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유럽은 물보다 술이 저렴해요. 하하, 그리고 맥주도 마시고 싶었구요. 꼴레뇨는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해서 썰기도 힘들었어요. 다들 이렇게 짠 음식을 먹는데 왜 날씬하고 키도 클까 궁금해 하던 질문에 대한 답이, 먹기 전에 힘이 엄청 들어가기 때문일 거라 추측할 정도로요. 맥주가 없으면 안 될 정도로 짰어요. 결국 얼마 못 먹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난, 다 먹지 못해 아쉬운 음식이 꼴레뇨였거든요.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 노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럴 땐 시간도 빨리 가요. 며칠 간 그냥 숨만 쉬었는데, 한국행 비행기를 놓치지 말라는 톡이 왔어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이 완전히 이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움이 조금이라도 덜 느껴지도록, 늦은 저녁, 카를교로 향했어요. 다들 같은 마음인지, 사람이 많았습니다. 버스킹 공연을 하는 연주자들, 그림으로 순간을 추억하는 연인들, SNS에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찍어 올리는 친구들, 그리고 이 모든 걸 눈과 마음으로 담고 있던 저. 모두가 하나 되어 밤을 맞이했어요.

강 내음 풍기는 바람이 머리칼을 이리저리 휘날리는데, 저도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싶었답니다. 다음 날 세시 쯤 공항으로 가면 되는 일정이라 도심 속 풍경을 새기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어요. 어둑한 골목, 누군가가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무서웠어요. 동양인 여성으로서 여행하는 내내 긴장을 늦추기란 꽤 어렵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같은 방향으로 걷던 사람들이 다함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이내 취객의 흥얼거림은 한 편의 콘서트 곡이 되었고,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행복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어요. 저도 객원 가수 한 명으로 목소리 내기에 동참했구요. 재즈로 유명하다던데, 다음엔 크리스마스 시즌에 와서 재즈 카페에 가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카를교에서, 프라하성 보기

떠나는 걸 알아서일까, 날이 흐릿했어요. 지난 닷새 간의 청명했던 나날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요. 관광 첫날과 마지막 날이 흐린 게, 우연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절 향한 누군가의 인사라고 믿고 싶었어요. 비도 살짝 내렸던 걸로 기억해요. 영화 속 청춘들처럼 옷으로 머리를 가리고 이리저리 달렸는데, 그러고 나니 다시 햇살이 드리우더라구요. 끝까지 아름답기만 한 프라하였죠. 비행기에 올라타면서, 저 자신에게 내년에 또 오기로 약속했습니다. 체코를 포함해서, 그때는 더 많은 국가를요. 좌석에 앉아 당장에 계획을 적어내려갔어요. 어디를 가야 할까, 겨울의 유럽을 보자,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기 좋은 국가가 어디지... 그렇게 전, 졸업까지 딱 1년을 앞두고 유럽에 미치고 말았습니다. 괜찮았어요. 처음으로, 제가 돈을 벌어야 할 이유를 찾았으니까요. 글을 쓰면서 여행을 다니고 싶어졌어요.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 전해주는 멋진 일에 욕심이 생겼어요.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고, 문화를 경험하면서요.

천문시계탑 광장에서

정말 열심히 돈을 모았어요. 옷도 덜 사고, 밥도 덜 먹고, 카페, 병원 등 장소를 불문하고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학교생활에도 충실했어요. 동아리를 그만 두고 성적관리에 올인해서 졸업식 성적 우수상 수여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던 제 일상에 활력이 생긴 셈이에요. 학기를 마무리할 때 쯤, 방송 콘텐츠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른 콘텐츠를 다루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는 것도 콘텐츠일 텐데, 이걸 방송으로만 풀어야 하나 싶었거든요. 이미 많은 여행 에세이가 있지만, 분명 제 스타일이 있을 거니까요. 하지만 방법을 몰랐어요. 콘텐츠가 대체 뭔지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구요. 그래서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다음 단계로 성장할 목표가 생긴 거예요. 감사하게도 문화콘텐츠학을 전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해 온 여행을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어요. 세계 여행을 꿈 꾸던 제가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 프라하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그리고 다시 체코. 다음 해 겨울, 두 번째로 찾은 유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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