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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어디 어디 가봤어?

다섯 번째 유럽 -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 편

by 글한송이

몸이 늘 차가워서 그런지, 분위기도 그렇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냉정하고, 칼 같아서 법 대로 살 사람이란 평가가 늘 뒤를 따라다녔죠. 대학 때 한 친구는 저더러 <겨울왕국>의 엘사라고까지 했어요. 그냥, 차갑다는 이유 만으로요. 따뜻한 이미지를 풍기고 싶어서 달달한 향수도 써보고, 옷도 캐주얼하게 입어봤는데, 노력을 하면 할수록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이 많았던 때였습니다.

남들은 안 어울린다고 하지만, 전 아기자기한 것들을 꽤 좋아해요. 물론 심플하고 모던한 게 더 취향에 맞긴 하죠. 그렇다고 작고 귀여운 무언가를 병적으로 멀리하지 않아요. 아기 신발만 보더라도 귀여워서 한참을 서성인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까요. 그래서 체스키 크룸로프 역시 제 마음에 쏙 드는 도시였어요. 체코 자체가 워낙 작은 나라이긴 해요. 하지만, 수도인 프라하와는 달리 건물마저도 조그마한 동네라서, 더욱 깜찍하게 보였죠.

잘츠부르크 → 체스키 크룸로프 경유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기차나 버스를 탈 수 있었으나, 셔틀을 이용했어요. 체스키 크룸로프는 당일치기 코스로 계획을 잡았기 때문에 저녁때에는 프라하에 도착해야 했거든요. 짐을 들고 돌아다닐 수는 없어서, 처음 체코 여행을 계획했을 때 이미 한 번 이용해 본 CK셔틀 서비스를 다시 찾았습니다. 쾌속 질주를 해주신 덕에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도착해서, 여유롭게 마을을 구경할 수 있었어요.

날이 또다시 흐려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기온도 떨어져서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여행에서 날씨는 정말 중요하죠. 두 번 다시 겨울에 여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여행 국가가 나한테 잘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 중에는 사람과의 불편함이 없었는지, 음식 취향이 비슷한지, 그리고 날씨가 여행 기간 내내 좋았는지가 있대요. 다른 충족 조건이 더 많겠지만, 우선 세 가지만 놓고 본다면, 오스트리아는 날씨가 아쉬웠고, 헝가리는 음식이 다소 느끼했어요. 반면에 체코는 세 가지 다 완벽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비가 그치고 해가 고개를 내밀었으니까요.


란트란 거리

신기하게도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어플을 사용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하늘이 맑아졌어요. 먹구름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고, 하얀 뭉게구름과 햇살이 강물을 반짝였죠. 지난 체코 여행 때 이미 많은 예쁜 추억들을 담아 갔었는데,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센스에 새삼 반했답니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체코 명물이죠, 뜨르들로, 일명 굴뚝 빵은 오리지널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스크림을 넣은 그리운 그 맛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얼마나 뛸 듯이 기뻤던지. 여전히 겨울이었고, 기온도 상당히 낮았지만, 젊은 패기로 콧물 훌쩍이며 아이스크림 뜨르들로를 손에 넣었습니다.

뜨르들로

저게 뭐라고 그랬을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화여대 근처에 굴뚝 빵 가게가 생겼을 때 그 감격스러움은 잊히지 않아요. 가히 최고의 간식이라고 말할래요. 물론, 저거 먹고 나면 배가 온종일 불러서 과장해서 말한다면 다이어트 식이라고도 하고 싶네요. 당분에 탄수화물 덩어리라 매일 먹으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겠지만요.


체스키 크룸로프 성에서 한 컷

체스키 크룸로프는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해요. 300년 동안 새로 지은 건물이 없다니, 정말 대단하죠. 어느 나라든, 역사를 보존한다는 건 멋지고 존경스러운 의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나라도 외국인들에게 그렇게 보였으면 해요. 문화유산이 화재로 소실되고, 사적인 이익에 하등 하게 여겨지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간절히 바라봅니다. 동화 마을 체스키 크룸로프는 성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와서 마음이 벅차올라요. 빨간 지붕들은 레고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하죠.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옷도 무겁고 해서 숨이 벅찼어요. 무릎이 좋지 않은 동생은 아마 더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이 예쁜 모습들을 보고도 별 말이 없었어요. 감정을 공유하는 데에 큰 행복을 느끼는 저로서는 서운함이 들 수밖에 없었어요.


이발사의 다리 위에서

차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오다 보면 이발사의 다리라는 구시가와 란트란거리를 이어주는 길이 나오는데요, 이 다리를 건너면 체스키 크룸로프 성으로 갈 수 있답니다. 그런데 한강을 통과하는 다리처럼 OO대교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이발사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걸지 궁금했어요. 지나다니다가 들은 가이드의 설명과 포털의 도움으로 알아낸 배경은 다소 가슴 아팠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는 혈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친족과 결혼을 해서 갖가지 질환을 앓았어요. 루돌프 2세 역시 정신질환을 갖고 태어났죠. 그는 요양차 체스키르롬로프 성에 왔다가, 이발사의 딸을 보고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하게 돼요. 하지만 그는 정신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아내를 살해했고, 그 사실을 완전히 잊은 채 살인자를 찾겠다며 죄 없는 사람들을 처형했어요. 그래서 이발사는, 자신이 딸을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려고 자신을 희생한 이발사를 기리기 위해 다리의 이름을 '이발사의 다리'라고 지었다네요. 그림도 음악도 뭘 알아야 감동이 배가 된다고 하잖아요. 길을 건너기 위한 수단일 뿐인 다리에 이런 사연이 있다고 하니, 왠지 걸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그의 울음 같아서 씁쓸했어요. 심지어는 맞닥드린 이야기를 회피하고 싶어 져서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착잡했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스보르노스티 광장

쾌청한 하늘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내내 지속되다가, 딱 시작점으로 돌아온 3시간 후에 다시 흐려졌어요. 광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서 망정이지, 이후엔 계속 비옷을 입고 돌아다녀야 했죠. 계단을 내려갈 땐 돌길에 미끄러질 뻔했어요. 동생 아니었으면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거예요. 다리가 아프다며 멀찍이 떨어져서 오던 애가 쏜살같이 달려와 잡아줘서, 고마웠어요. 뭐 그런 말을 하냐며 낯간지러워하다가, 하체에 힘이 없는 건 배가 고파서라고 주장하기에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지만, 예약 손님들로 꽉 차서 자리가 없었던 기억이 나네요.속은 허하지, 날은 점점 어두워지지, 눈과 섞인 비가 옷을 적시고, 추위가 몰려오면서 우연히 한 박물관을 찾았죠. 박물관은 사실 많이 볼 것들은 없지만, 잠시 추위를 피해 쉬어가는 정도라면 적당해요. 영주의 성, 종탑 등등 장소들을 방문하고도 손이 시려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한 사실을 알았던 때가 박물관에서 스멀스멀 걸어 다닐 때였어요. ^^;

동생

거의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셔틀에 탑승해 프라하로 출발했습니다. 몸이 노곤 노곤해지니까 잠도 몰려오고 피곤했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승객들과 합석해야 했던지라 둘 뿐인 저희가 앞좌석에 앉는 바람에, 기사님께 죄송해서 눈을 부릅뜨고 자지 않으려 버텼어요. 허허벌판인 도로를 지루하게 달리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차만 타면 쿨쿨 자느라 바빠 외로이 운전대를 잡았을 아빠한테 너무 죄송한 거 있죠. 운전면허를 취득했을 때가 돼서야 운전자의 피로를 알았고, 조수석에서 버티고 나서야 조수석 탑승자의 역할을 깨달은 게 민망하기 그지없네요. 2인승 조수석이라 다행이었다고 합리화해보려 해요. 가뜩이나 차가운 혈관이 동생 온기에 조금은 긴장을 풀었으니까요.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따뜻한 사람들은 나랑 뭐가 어떻게 다른 건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동생과 비교하면서요. 그러니까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따스한 마음은, 누군가의 감정을 재촉하지 않아요. 돌아보면 늘 제 곁에 있고, 생색도 내지 않죠. 시간이 흐를수록, 미안함보다 고마움이 커지게끔 하는 매력을 가졌고, 묵묵히 챙겨줄 줄 아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났어요.

손은 언제까지고 차가울 거예요. 이건 체질이라 아침마다 운동하고 저녁마다 족욕을 해도 어떻게 안 돼서 반쯤 포기했어요. 하지만, 내가 '우와'하고 감탄을 자아낼 때 다른 사람은 속으로 탄성을 지른다는 것, 멀찍이 떨어져서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는 것 같다가도 꼭 필요한 순간에 등장한다는 것, 그래 놓고도 생색한 번 안 낸다는 것, 그런 것들은 노력하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미지근한 사람이 되진 않았을까 나름대로 위로를 해 봅니다. 동화 나라 체스키 크룸로프는 제 마음까지도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려놓은 게 분명해요. 강한 비바람이 몰아친 독일 드레스덴에 가기 전에 '따뜻한 사람'의 정의를 얻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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