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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어디 어디 가봤어?

네 번째 유럽 -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편

by 글한송이

'미련이 없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은 주로 부정적인 일이 있은 후에 쓰이곤 하죠. 후회하지 않을 만큼 노력했다, 더는 붙잡거나 뒤돌아보지 않겠다, 나는 쿨하다. 전 미련이 없단 말은 '훌훌 다 털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지난 일은 싹 잊고, 무엇이든 새로이 받아들이겠다는 거죠. 잘츠부르크 여행은 제게 그랬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의 축 처지는 며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힘을 쫙 빼고 난 후라 기운이 없었거든요. 그렇다고 남은 일주일을 대충 보낼 순 없잖아요.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를 겨울의 유럽이니까요. 그래서 리셋하기로 했어요. 지난 과오는 잊고,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자.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순간에 미련 두지 말고, 남은 여행을 즐겨보자. 그렇게 다짐하고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나름 괜찮았습니다. 걱정도 많이 하고 긴장도 엄청 해서 시간이 굉장히 빠르게 지나갔거든요. 다만, 다소 충격적인 트라우마를 얻었죠. 저는 기차 안에 들어왔는데, 짐은 다 바깥에 놓여 있는 찰나의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우리나라는 어서 기차를 타렴, 이 시간에 출발할 거란다 등등 승객을 위한 서비스가 잘 되어 있잖아요. 그걸 생각하고 기다렸거든요. 이 기차가 과연 맞을까, 한참을 헤맸어요. 근데 시간은 점점 다가오지, 기차는 떠날 준비를 하지, 문은 도미노처럼 하나씩 쿵쿵쿵 닫히지. 진짜 심장 쪼들려서 얼마나 달렸게요. 문이 닫히면 타지 못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다행히 학창 시절 계주 선수 8년 경력자답게 마지막 호차 문이 닫히려는 순간 탑승할 수 있었죠. 그런데, 세상에나. 제 몸만 들어와 버렸어요. 네, 다른 건 다 버리고요. 기차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릉그릉 거리는 게 곧 출발한다고 신호를 보내왔죠. 미련은 다 비엔나에 버려두고 즐거운 여행을 다시 시작해보자 다짐하고 왔는데, 더 최악인 거예요. 손이 덜덜 떨리는데, 기차 내부에 무슨 버튼이 하나 있어서, 혹시나 하고 꿍꿍 눌렀어요. 그러니까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어요. 후아.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되는 동생과도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나오는 사진들은 모두 멋진 풍경 사진은 안 찍고 제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카메라에 소중히 남겨주는 친동생이 찍어준 거예요. 더욱이나 헤어져서는 안 되겠죠? ^^ 아직도 생각납니다. 동생 이름을 부르며 달리라고 외쳤던 제 모습이요.

잘츠부르크 게츠 라이데 거리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비엔나에서 만난 현지인보다 까칠하고 무뚝뚝한 느낌이었어요. 지역적으로 날씨가 더 추워서인지, 상대적으로 시골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인종차별은 아니었어요. 감사하게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에서는 그런 수준 떨어지는 이들을 보지 못했답니다. 그래도 친절한 한국사람들이 새삼 그리웠어요. 마트만 해도 그래요. 감사하단 얘기가 입에 밴 우리잖아요. 잘츠부르크 대표 마트는 BILLA인데요, 처음엔 미로 같아서 같은 곳을 몇 바퀴나 돌았어요. 카운터에서 말고는 다른 직원이 보이질 않아서 한참 헤맸죠. 그래도 금방 적응해서, 나중엔 살 것만 사고 나오는 알뜰 쇼퍼가 되었답니다. 부다페스트를 다녀와서 그런지 물가가 확 오른 느낌은 없지 않았어요. 그래서 간단하게 마트에서 사 먹는 식으로 경비를 아꼈는데요, 그 와중에 슈니첼도 먹고, 크레페도 먹고, 카페도 가고, 술도 마셨어요. 하하, 그런데도 맛있는 음식을 먹은 기억보다, 걸어서 올라갈 수 없는 산의 눈을 밟았던 기억이 훨씬 강렬해요.

잘츠부르크 카드라고 해서 정해진 시간 동안 입장권과 교통비를 대신할 수 있는 관광 상품이 있는데요, 24시간권을 구매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운터스베르크(Untersberg)였습니다. 해발 1776M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해요. 설경이 아름답지만, 겨울엔 날씨가 좋지 않은 경우 올라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지라 가슴 졸였는데, 다행히 이 날은 해가 쨍쨍 떠올랐습니다. 카메라로 찍었는데, 그림처럼 나오는 굉장한 곳이었어요.

같은 관광객이었던 어떤 외국인 분이, 건너편에 스위스 알프스 산이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신 덕분에, 눈을 크게 뜨고 국경을 맞닿은 스위스도 구경할 수 있었어요. 아예 등산복을 갖춰 입고 정상까지 향하는 분들도 만났는데, 멋있어 보였습니다. 등산을 좋아하긴 하는데, 여행 와서 산을 타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거든요. 한국에서도 정상을 가본 경험은 부끄럽게도 두 번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운터스베르크

시내까지 돌아가려면 한 시간이 걸려서, 아쉬움은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배가 엄청 고팠어요. 물론 잘츠부르크 카드로 1회 무료입장이긴 했지만, 어쨌든 일은 25유로짜리 케이블카가 다 했는데, 배꼽시계는 칼같이 칭얼거렸죠. 슈니첼을 먹으러 <Restaurant S’Nockerl im Elefantr>를 찾았어요.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가는 골목길에 있어서 금방 찾았는데요, 여기 두 번 못 간 게 너무 후회돼요. 양도 많고, 진짜 맛있었거든요. 레몬을 뿌려 먹으면 그 맛이 얼마나 일품인지, 또 군침이 도네요. 크레페도 맛있었어요. 달아서 배가 부른 다음부턴 살짝 물리긴 했지만, 다시 간다 해도 또 주문할 거 같아요.

Restaurant S’Nockerl im Elefant의 슈니첼과 크레페

잘츠부르크 카드는 24시간, 36시간, 72시간권이 있는데, 전 26유로에 24시간권을 구매했기 때문에 빠듯하게 움직였어요. 프라하보다 작은 동네라 도보로도 충분했지만, 호엔잘츠부르크 성 같은 대표 관광지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푸니쿨라를 이용해야 했어요. 호엔잘츠부르크 성(Festung Hohensalzburg)은 산 꼭대기에 위치한 성이면서, 요새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시대 성 중에서 가장 크다죠. 푸니쿨라 아니었으면 올라가는 것만 해도 오랜 시간이 소요될 테니, 적들이 침략하기 어려운 요새는 맞는 거 같았어요.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잘츠부르크 마을 전경은 마음을 탁 트이게 만들었고, 20세기 초 전범국 죄수를 수용하는 감옥으로 이용됐다는 내부를 구경하면서는 공포감이 살짝 엄습했어요.

잘츠부르크는 이렇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일명 '전망대'가 상당히 많은데, 그 각도가 저마다 조금씩 달라서 느낌도 사뭇 달랐어요. 뮌히스베르크, 잘츠부르크 대성당 등 여러 군데 포토존이 있죠. 그중에서도 호엔잘츠부르크 성이 가장 예뻤어요. 뮌히스베르크의 물도 보이고 차들도 지나다니고, 미라벨 정원으로 이어지는 큰 길이 보이는 풍경도 물론 마음을 사로잡기엔 충분해요. 다만, 저는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광경이 펼쳐지는 게 더 마음에 들었나 봐요. 처음엔 지나치게 무뚝뚝한 유럽 문화에 문화 충격을 받았지만, 나중엔 그게 굉장히 편해지는 순간이 와요. 전 그랬어요. 여행을 좋아하는 거면, 국내 여행도 있는데, 굳이 유럽을 몇 번이고 찾은 이유도 여기 있죠. 사람들의 관심에 지쳐서였으니까요.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No one was ever mean about it, it just, I could never get very exited about other people's ambitions for my life." 남자 주인공 제임스가 한 말인데, 이 말이 여태 잊히지 않는 걸 보면, 저도 꽤 우울했나 봐요.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무슨 배부른 소리냐 할 수도 있지만, 겁나긴 마찬가지였어요. 축하 인사도 받고, 응원과 덕담도 많이 들었지만, 그 역시 제겐 부담이었거든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요새는 대학원 나오면 취업이 더 힘들다는 걱정 어린 시선도 어깨를 짓눌렀어요. 제 인생에 남들이 더 의욕적이고 열정적이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자연 속에 즐비한 건물들을 보고 있을 때면, 힘겨움이 스르르 녹아내렸습니다.

미라벨정원

날이 좋아서 미라벨 정원까지 다녀왔어요.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로 유명하죠. 여긴 꽃이 피는 봄과 여름, 혹은 낙엽이 예쁘게 떨어질 가을에 방문하시길 추천드릴게요. 사진을 남기고 싶은 분이라면 실망할 수 있거든요. 여름에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드넓은 정원을 설렁설렁 걸어 다녔는데, 겨울이라 관광객이 적어 가능한 좋은 점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마켓은 비엔나, 부다페스트와 비슷했지만, 야외 스케이트장이 오직 아이들을 위한 느낌이라 유독 부러웠어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깔깔 웃는 어린 친구들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어린이날 선물 수여 대상자에서 제외된 지 너무 오래 흘렀다는 게 서글펐습니다. 그렇다고 한국에 돌아가서 스케이트를 타고 놀 것도 아닌데 말이죠.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라 스케이트쯤이야 잘 타지만, 책 한 권 들고 커피 향에 취해 카페 음악을 듣는 게 더 좋은 나이가 됐거든요. 오스트리아는 그런 편안함을 주는 나라였어요. 비엔나에 이어 잘츠부르크에서 찾은 카페에서 즐긴 여유가 그 증거예요. 아인슈페너 커피와 자허토르테는 절대 잊지 못해요. <cafe Tomaselli>에서 한가로운 점심을 보냈거든요. 멜랑쥬 커피도 어떻게 이런 맛이 나올 수 있는가 감탄하느라 바빴는데, 아인슈페너도 최고의 커피였어요. 이후에 커피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이탈리아도 갔었거든요, 음, 글쎄요. 제 입맛은 오스트리아 완승입니다. 그래도 둘 중에 하나 골라야 한다면, 51:49로 멜랑쥬를 고를래요!

in the cafe Tomaselli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유럽에서 먹기 힘들다는 sea food, 새우와 다른 안주거리를 사들어 숙소로 돌아왔어요. 겨울 유럽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마시는 술이라 취할까 봐 상당히 많이 사 왔답니다. 삶은 감자, 과일, 감자, 새우, 한국에서 챙겨 온 라면까지 모조리 해치웠어요. 새우는 너무 맛있어서 다음 날 또 먹었는데요, 값이 꽤 비싸서 눈물을 머금었네요. 대신 과일은 정말 저렴해요. 외국인들이 한국 과일 너무 비싸서 못 먹는다고 아쉬워하는 유튜브 영상들을 종종 봤었는데, 실감했죠.

크리스마스 마켓과 미라벨 정원의 야경

여행하면서 꼭 빼놓지 않는 건 기념품이에요. 하루 날을 잡아서 돌아다닐 정도로 신중하게 마을 안 모든 shop을 돌아다닐 정도로요. 잘 보면, 같은 제품인데 가격은 천차만별이거든요. 잘츠부르크에서 유명하다는 초콜릿 술도 구매했어요. 도수가 꽤 높았지만, 초콜릿의 달달한 향 때문에 금방 마실 수 있었어요. 따뜻한 핫초코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숙소에서 5분이면 도착하는 게츠 라이데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고, 보너스 그릴 핫도그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체코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거든요. 체스키 크룸로프는 처음 가는 마을이라 사전 조사가 필요했고, 당일치기로 떠날 독일의 드레스덴도 미리 공부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였죠. 한국에서 미리 가져온 자료와 느린 와이파이로 열심히 구글링을 하며 마지막 하루도 알차게 보냈어요. 떠나기 싫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체코 굴뚝빵(뜨르들로)을 생각하라는 동생 말에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답니다. 아마, 할슈타트를 가지 못해서 여전히 그리운 장소로 기억되는 것 같아요. 가기로 예정했던 날, 너무 흐려서 배가 뜨지도 않을 수 있다는 소식에 다음으로 미뤘거든요. 해가 창창한 여름에, 다시 방문해야 할 또 다른 이유를 만들었네요.


미련을 버리기로 한 첫 여행지였는데, 쉽지만은 않았어요. 두 번 방문하기로 마음을 달래며 셔틀 차량에 올라타는 내내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애썼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말이 있잖아요. 처음은 관광이오, 두 번째부터가 진정한 여행이다. 그래서 두 번 찾은 체코 이야기도 곧 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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