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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0원 아이스라테 한 잔의 여유

by 온화

82년생 김지영은 공원에서 1500원 커피를 마시면서 맘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82년생 김지영]이 2016년에 나온 소설이니, 10년이 흐른 2025년에도 커피를 마시는 아이 엄마를 보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을까. 너도나도 마시는 커피인 것을.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다. 혹시라도 있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커피를 마신다.


2016년 당시에는 1500원 커피를 마셔서 욕을 먹었다는 김지영의 말이 가슴에 콕 박히질 않았다. 나도 82년생이고,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었지만. 김지영의 속상함에 공감하기보다는, '그래도 지영이 너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에 나가서 커피 한 잔 사 먹을 여유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을 뿐이다. 부럽다거나 속상하다거나 하는 사치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연년생 아들 둘과 갓 태어난 막내딸을 키우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고나 할까. 잠자는 시간과 맞바꾼 책을 읽을 수 있는 찰나의 시간이 내 여유와 사치의 전부였다. 그렇다고 십 년 전의 시절을 고생의 시간으로만 치부하지는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과 시간이었기에 행복했고, 그 시절을 장하게 지내온 내가 뿌듯할 뿐이다.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커피를 찬찬히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급하게 테이크아웃 하는 커피가 아닌 매장 안에서 느긋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커피 한 잔이 주는 의미는 크게 다가온다.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었다. 세 명의 아이들이 모두 다른 학교(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기에, 방학식과 개학식이 모두 다르지만. 첫 번째 아이의 첫 방학식이 있는 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는 길에 매장 안의 한 커피숍이 눈에 띄었다. 여름방학을 잘 보내보자는 나에게 주는 응원의 의미로 3500원의 아이스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막내가 하교하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 하기에, 여유로운 커피는 못 마시고 테이크아웃을 했지만. 매장에서 산 커피 한 잔이 주는 정신적인 위로는 즐겁게 다가왔다.


커피맛을 잘 모른다. 우유를 좋아하는 나는 겨울에는 따뜻한 라테, 여름에는 아이스 라테를 즐겨 마신다. 여러 브랜드의 라테를 마시면서, 어디 커피가 그래도 더 맛있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커피를 잘 아는 친한 친구가 내 말을 듣더니 웃으면서 한 마디를 했다. 라테는 커피맛이 아니고 우유 맛으로 먹는 거야. 맛있는 라테는 내가 좋아하는 우유 브랜드를 썼던 걸까. 원두가 좋든, 우유가 좋든. 내 입에 잘 맞는 라테를 마시기만 하면 되는데, 마트 안에 있는 커피숍의 아이스라테는 맛있었다. 개학하기 전까지 마실 여유가 없을 '사 먹는 라테'로는 제격인 커피였다.


7월의 마지막 아이스라테가 될 커피의 빨대는 하트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몽글해진 걸 수도 있다. 분홍색 하트 빨대와 시원하고 고소한 아이스 라테가 건네준 응원의 한 조각으로 8월까지 충분히 즐겁게 방학을 버틸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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