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건 첫 개인전, '사막에서' 찾는 자아통찰의 여정
이혜건 개인전은 “사막에서(In the Desert)”라는 주제로 7월 10일부터 7월 15일까지 마루 아트센터 신관 3층 3관에서 열린다.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처음은 모든 것의 출발이고 의미의 발현(發現)이다. 누구나의 공든 탑도 처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혜건 작가는 첫 인상이 여리고 단아해 보였다. 작가노트에서 제시한 key word인 “하얀 사막”은 작가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조용히 찾는 곳이라 하였다.
(그래서) "사막에 가본 적이 있는가?" 라고 물었더니, “가본적은 없다”고 하였고, (하얀 사막은) 글쓰기와 그림을 그리는 자신에게는 그 일들을 하는 현장의 표상이며 상징적인 장소라는 답변으로 대신한다. 곧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정신적 안식처이며 숭고한 희망의 장소와 다름 아닐 것이다.
또한 그곳은 “너무나 완전무결하여 방향조차 없고, 걷는 이의 얼굴도 이름도 모두 사라진다.”고 하니 세상의 원형질(origin) 그 자체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한편으론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더불어 동화와도 같은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가 여우를 만났던 ‘아프리카의 사막’, 오래 전 읽었던 「알랭드보통」(<여행의 기술>)의 ‘시나이 사막’, 그리고 독일의 행동하는 철학자이며 탐험가 「라인홀트 메스너」(<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의 ‘고비 사막’이 줄이어 생각났다.
사람들의 인식은 의미론적 측면에서 발동하기도 한다. 존재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자신이 부여할 의미를 결합하여 대상이 고유하게 가진 존재성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처럼 이혜건 작가의 진지한 성찰의 개념을 필자의 인식으로 이해하려 시도 중이며, 또한 대중들의 시선도 다르지는 않으리라 여긴다.
다만 이 젊은 작가는 자신이 바라본 세상과 자신이 이룩하려는 삶이라는 원천을 자신의 시선으로 인식하여 의미화하려 하며, 이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존재와 삶을 스스로 풀어내고 재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해 나가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연관되는 상대이거나 관찰자가 되어주기를 청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 또는 자신이 받아들인 삶의 환경을 "하얀 사막"이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그 속에서 정체화(identification)하기 위해 고된 노력이나 행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 관찰자이며 소통의 대상자들에게 이를 인식시키려 하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사막의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 말이 떠올랐고, 혹시 이 작가는 그 말을 연상하는 중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하였다.
필자는 이 작가에게 왜 이런 개념을 선택했고, 어떻게 인지하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묻지는 않았지만, 전시된 20여점의 작품을 통해 사막이 가진 여러 상징적 의미와 자신만의 방식에 대해 답하려 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작가는 자신의 전시를 “홀로 걷는, 얼굴도 이름도 없는 푸른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라고 서두에서 언급하였다. 또한 표정도 성별도 없으며, “존재하며 행동하는 사람”으로 오롯이 자신으로만 존재한다고 하였는데, 이런 표현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주제의식을 아직은 명확히 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으나, 그의 잠재된 내적 은밀함은 “파란 사나이”라는 특정한 실체에서 상징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벌거벗은 원시적 이미지의 신체와 “파란색”을 통해 대략의 의도는 드러나는 중이다. 아직은 다듬어지지 못한 원시성과 괴테(Goethe’)가 ‘자아를 매혹시키는 무(無)의 색‘이라 한 “파란색”을 통하여 내면의 의지를 시각화하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림은 시각화(Visualization)를 통해 소통되어지는 것이며, 독자들은 발신자의 부호화한 메시지를 자기의 인식체계를 통해 해석하려고 한다. 또한 작가는 모호함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이미 ‘파란 사나이’는 스스로의 몸짓과 행위로서 자신의 사유와 요동하는 내면의 의식을 밖으로 분출하는 중이어서, 정제되지 않았을지언정 자신의 격한 의지가 외부로 전해지는 것을 막아내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이혜건 작가의 작품들은 콘테(Conte’)크레용으로 밑그림 삼아 형태를 그린 뒤 채먹(彩墨)으로 색상을 입혔지만, 얼핏 보면 작업 중에 잠시 멈춘 듯, 미완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친 바탕그림이 그대로 드러나고, 채색은 하였어도 대충 붓 가는 대로 칠한다. 처음의 뜻이 아니어도 시선에 따라 형상이 뒤틀리고 선이 조금씩 어긋나도 그대로 놔둔 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방만하면서 자유롭게 그림에 빠져드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물론 채묵(彩墨)을 사용하여 색을 입히니 여백이 자연스러운 듯 여겨지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거칠고 과감하게 작업을 해 나가면서 예정에 없던 터치(touch)조차도 스스로 수용하려 한다.
작가는 ‘자기반성’을 위해 사막 한 가운데 사유의 공간에 갇혀 사유가 이끄는 대로 나아가려 하는데, 그래서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으니, 이것이 오히려 외로움과 고독함을 자초하면서 어떤 움직임이나 방향조차 인정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행보”를 그대로 화폭에 표상(representation)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한편 “무(無)로의 여행, 마음으로의 여행”을 꿈꾸며 “고비사막”을 건넜던, 모험가이며 철학자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내안의 사막”이라는 개념과 동일시 할 만 한 시도일수 있다.
그만큼 이혜건 작가의 지금은, 진지하지만 ‘과감하고 절박하다’ 할 것이다. 즉 내가 선택한(선택하려는) 길이 바른 길인가? 혹은 잘못된 선택은 아닌가? 더 나은, 더 올바른 길이 또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닌가? 출발선에 서있거나 출발해야 했던 사람들의 생각은 이처럼 확신할 수 없을 만치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이혜건은 이미 자신의 길을 나섰다. 방향이 맞던 틀리던, 그는 되돌아 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나아가고자 한다. 지금의 그의 모습은 앞으로 향해 있을 뿐이고, 누구보다 앞서 나가고 있는 중이므로, 앞모습의 초상(肖像)을 보여 줄 수 없다. 따라서 그가 그린 자신의 초상은 “뒷모습”일 뿐이다.
또한 그가 자신의 내면에 품은 정신과 의지를 담아 드러낸 시각적 결과들은 거칠지만(rough) 부드럽고, 단조롭지만 과감한 행위들을 담아내고 있다. 한편 이는 여전히 정서적 불안감과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는 징표일수도 있지만, 되돌리거나 멈추지는 않으려 한다. 일단 나아가려 할 뿐이다.
이혜건 작가는 인간의 모순이나 불완전성, 정의, 통과의례 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고민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기통찰의 절차요, 성장의 모멘텀을 위한 의미를 가진다 할 수 있다.
영국의 시인 「월리엄 위드워즈」는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고 하였다. 인간의 생애는 어느 단계에서든 이러한 시간의 순간들을 거친다. 이는 결코 고통스럽거나 고뇌에 찬 비극의 순간만은 아닐 것이다. 절차적 경험으로의 단순한 삶의 메카니즘이기도 하고, 이를 통해 인간은 성장하면서, 터득의 과정을 거치고, 삶의 희망과 평안을 구가하게 되기도 한다. 더욱이 예술가에게는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자기성찰과 수행이라는 역정(歷程)의 일부이거나 전부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혜건 작가는 이런 과정에서 물러섬이 없이 과감하고 거칠지언정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이미 4개의 막(幕)을 구상한 상태이고, 이제 그중에서 겨우 1장(場)을 보여주는 중이다. 일단 그가 구성해 놓은 4막이 궁금하다. 그 시작이라 할 첫 장(1장)의 표출이 아직 영근 결실을 예상할 수는 없으나, 꽤 impact가 있다고 보여 지며, 또한 시작부터 통합적이며 장기적인 안목을 살필 수 있게 하니,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화석(2024 0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