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7. 블먼, 테런스 "내 길에서 걷고 있는 영혼을 만나다"
오래전, 친구와 한 달 정도를 절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대학 졸업이 임박한 여름이었다. 입학동기들보다 한 학기 먼저 졸업하는 것인데,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곧 바로 복학을 하였기에 그만큼 졸업시기를 한 학기 앞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8월에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그 해 7월 중순경에 어릴 때부터의 친구가 회계사시험 준비를 하기 위해 절에 들어가고자 했을 때 그를 따라 같이 절에서 지내기로 하였었다.
나는 종교를 불교라고 말하면서도 절에는 제대로 가본 적이 없었고,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절을 올려본 적도 없었다. 그런 내가 절에서 숙식을 하며 당분간 산다는 것이 낯설고 어색한 일이었으나, 한편 생각하니 뭔가 특별하고 의미있는 경험이 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친구와 같이 절에서 지낼 생각은 아니었다. 절에서 지낼 계획을 세우고 있던 친구는 어느 절이 적당할 지 알아보기 위해 우선 강화도에 있는, 오래된 절이지만 그리 크지 않으면서 한적한 곳에 있는 정수사淨水寺라는 곳에 가보기로 하였다. 때는 1984년이었다(조지오웰의 1984년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바로 같은 숫자의 해이다).
요즘처럼 자동차가 흔한 시절이 아니니 버스를 타고 가야 했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도 시간이 꽤 걸리는 곳이었다. 당시에는 어디 먼 지방이라도 가듯 가야했다. 신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드물게 다니는 버스를 타고 강화읍 터미널에 내려 정수사로 가는, 강화도 안을 운행하는 시골버스를 타야 했다. 한 낮에 출발했지만 절에 도착할 때는 거의 오후 끝 무렵이었다. 버스 기다리는 시간, 그곳까지 가는 시간 등을 감안하면 당연히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 어떤 생각과 계획으로 그렇게 그곳을 갔는지 지금은 기억나지는 않는다. 당연하지만 돌아오는 일정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거나 아무 생각도 안했을 정도로 무계획적이었었다. 다 저녁때인데도 느긋하게 절 구경하고, 더불어 맛있는(?) 식사도 얻어먹었다. 아마 친구는 사전에 그 절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혼자 가기가 그러니 나를 대동한 것일 것이고 웬 만하면 그곳에서 공부하려는 생각을 했었을 것 같다. 절에서 먹은 식사는 우리 둘만 따로 먹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 절에 우리같이 절에 와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제공하는 식사는 절 특유의 식사가 아닌 일반인을 위한 제대로 차린 진수성찬이었다. 고기반찬까지 있는, 절집의 식사가 아닌 웬 만한 한정식 집 식사 같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서울로 가기 위해선 강화읍까지 가야 했으나 이미 버스 편은 없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일정이었고 우리는 천연덕스럽게 주지스님에게 하루 자고 갈 수 있느냐고 묻고 허락을 받아 그 절에서 잘 수 있었다. 난생 처음 깊은 산속의 절에서 자게 되었는데 처음엔 다른 사람들이 묵는 보통의 숙소에서 자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우리가 잘 자리가 없었기에 산신각山神閣에서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대개 산신각은 절의 여러 건물들 중에서도 가장 산 윗 쪽에 있으며 부처님이 아닌, 우리의 전통 신을 모신 곳이다. 낮에 가서도 절을 하려보면 긴장을 하게 되는 곳이다. 어찌 보면 무서운(?) 생각도 든다. 그런 곳인데 밤에 그 방에서 잠을 자야했다. 이런 속내를 스님에게 얘기할 수도 없고 얻어 자는 입장도 있었지만 태연한 척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절에 계시는 공양주께서 이불 베개를 가져다주었고 그곳에서 잠을 자고자 했다. 솔직히 무서운 마음으로 긴장을 하며 겨우 잠을 청했던 것 같다. 아무튼 요즘도 난 산신각에 가게 되면 잠시라도 앉아있다 오기도 하지만 오래 있지는 않는다. 여전히 긴장감이 있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하루를 잤다는 것은 대단하고 특별한 경험이라고 여기고 있다.
오래 전 4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본 것이다. 당장에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야 하거나 해결해야 하는 일들도 꽤 되거늘 이런 오랜 전, 잠깐 동안이었을 시기의 기억에 매달리는 내가 한편 한가한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내 머리 속이 다소 복잡하고 잡념이 많은 편이라 여기고 있는데, 그럼에도 그것들을 지워버리거나 깔끔하게 비워 두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그 생각들이 복잡하더라도 내게 필요하고 나로 인하여 비롯된 것인 만큼 이를 내가 다룰 수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니, 다만 정리는 좀 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버리고자 하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한편 탐욕이라면 탐욕일지라도 비우고 정리할 때는 아직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하고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듯한 나의 상태는 어쩌면 내게 부담이나 혼란을 줄 수도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누구는 이런 짐들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 여유롭게 하며 맑고 깨끗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여 평온과 안정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괴롭거나 크게 짐이라고 여기는 상태는 아니기에 그저 이런 나의 삶의 자세를 견지하며 유지해 오고 있고, 어느 때가 될 때까지 담아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심정일 뿐이다.
리G. 블먼과 테런스 E. 딜은 『내 길에서 걷고 있는 영혼을 만나다』 라는 책을 공동으로 썼다. 책의 제목만 보면 마치 명상이나 수행에 대한 책처럼 여겨진다. 물론 인간의 영적인 부분을 의식하며 쓴 책이기에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순수하게 정신 수행과 영적 가치를 중심으로 쓴 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처음엔 이 책이 영혼을 이야기하니 그저 ‘명상’이나 ‘마음 챙김’에 대한 책으로 생각하였다. 틀리지는 않지만, 결국 이 책은 조직관리 및 리더십을 실행함에 있어서 영혼의 관점을 결합하여 리더십의 전망을 넓힌 실용성을 기대할 만한 책이었다. 이른바 “힐링리더십healing leadership이라 별칭하며 영혼, 즉 개인들의 내면적 가치를 인간의 내면에 내재된 영적 가치와 결합하고자 시도하며 쓴 책의 일종이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가?’ ‘무엇이 더 효과적인가?’ ‘무엇이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에 대한 논의와 성찰을 하면서, 그 근본의 해결을 위해 선결해야 하는 것이 곧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문제인식과 해결 노력이 필요하며, 따라서,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여기에 왜 있는가?” “내 삶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어디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며 저자들은 그에 대한 영적인 여행을 시작하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이 책의 저자들이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수많은 선지자先知者들의 고민이며 제안이었기에 이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자가 이에 따른 행동적 노력을 스스로 수행해야 하는 문제가 남겨 지게 된다. 결국 이런 생각의 정리를 마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혼을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영성을 쌓게 될 과정을 따르고 그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이 책의 저자들은 강조하면서 실제 사회적 삶에서의 인간관계와 조직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저자著者들의 관점을 실어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정수사에 한 달 정도 있으면서 나는 친구의 경우와 달리 참으로 평화롭고 편안한 휴양의 시기를 보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친구는 고시공부와 같은 부담스런 공부를 해야 했지만, 나는 비교적 부담이 덜 한 상태로 그 해 가을에 치를 언론사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그렇게 절박하게 마음 급하게 매달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저 현실을 떠나 잡념으로부터 벗어나서 복잡하고 불편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틈(?)만 나면 그때 그 절에 와 있던 중학생 소년과 둘이 절 주변을 나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고 그 애가 배우고 있다는 가곡을 함께 부르며 그야말로 휴양지에서처럼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그때처럼 그렇게 한가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나 싶다.
절을 도량(道場)이라 하며 또는 수행처라고도 한다. 부처님을 모시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곳이다. 온갖 번뇌를 내려 놓으려하기도 하고,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원인과 본질을 알아서 인간 삶의 가치를 잘 누리고자 함도 있을 것이며, 뜻을 통하여 부처처럼 될 수도 있겠으나, 반드시 득도得道하여 부처가 되고자 애를 쓰지 않아도 작은 깨달음이나 그 터득으로 인하여 마음이 편안한 삶의 추구와 타인에의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만 있어도 인간으로서의 삶이 크게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닐 까 한다. 나는 마치 이곳에서 수행修行을 위해 마음의 번뇌를 내려놓고 마음의 혼탁을 정화하여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 와 있는 듯이, 조만간 내게 다가올 현실의 다양한 장애와 도전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에 대해서조차 회피하듯 편하고 여유 있는 시간 속에 맑은 영혼을 찾아, 와 있는 것 같았다. 영혼이란, 즉 영(靈, spirit)과 혼(魂, soul)은 인간 내면의 존재를 일컫는 것이고, 이는 생명 그 자체로서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마음인 것인데, 이 영혼을 편안하게 하며 그야말로 현실의 그 어떤 무게와 짐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순수한 상태 그대로의 영혼을 찾고자 하는 여행길에서, 나는 그 때, 그 생애 도중에서 그를 찾아 나선 과정에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목표로 했던 많은 기대들 중 어느 것은 이뤘고 어떤 절실했던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때로는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그간 관계됐던 사람이나 일들에 대한 탓을 하거나 원망을 하기도 하면서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아왔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거의 다 온 듯이, 다 끝난 듯이 여겨지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그렇지 않음을 느끼기도 한다. 많이 살았어도 여전히 욕망과 기대는 꺾기지 않았고 그러면서 여전히 시간이 남아있고, 이뤄야 할 목표가 있으며 이룰 수도 있을 것 같고, 이렇게 포기할 수 없는 욕구와 욕망을 안고 현재를 살고 있는데 그러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그간의 삶의 모습과 과정, 그 성과를 평가해 보기도 한다.
때론 삶이란 무엇인가? 내가 뜻을 두면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그것들은 무엇이며 어떤 생각으로 정리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내가 가치를 두면서 가장 중요하고 뜻이 있다고 생각한 것들, 내가 그동안 매달리며 절실하게 바라고 원했던 것들, 그것들은 무엇이었나? 또한 지속적으로 끌어안고 있으면서 지키고 키우려고 한 그것들을 어떤 의미였는가? 나의 삶의 노정에서, 나의 살아가는 행로에서 내가 의도했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내가 만나고 부딪히고 수용하고 거부하면서 나의 일부가 되기도 했고, 거부하거나 뜻하지 않게 놓치기도 했던 그것들, 그래서 그것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기도, 얻지 못해서 아쉽기도 했던 그것들, 나는 지금 그것들을 어떤 식이든 정리하고 생각해 보고자 하는 중이다.
아마도 삶의 문제에 대한 것은 어느 시기를 따지는 것은 아니다 싶다. 삶이 던지는 과제를 지속하여 받아들고 그를 해결하고자 꾸준한 노력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비슷하기라도 한 답答 근처를 배회徘徊하지는 않을 까 한다. 이는 스스로가 애쓰며 이끄는 수행修行의 양과 질적인 노력에 바탕을 둘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욕구 또한 인간에게 부여된 호기심의 일종 일지언정 떼어내기는 어려운 과업의 한 부분일 것이다.
우리의 생애는 긴 행로行路와도 같다. 중간에 끊이지 않는 죽 늘어선 길이다, 각 사람마다의 길이 그러하다. 그 긴 생애의 행로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셀 수도 없는 사람들과 조우한다. 때론 의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우연이고 예정되지 않았던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와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마음에 쌓거나 그로 인한 자극을 기억에 담아가면서 살아간다. 중요하고 그렇지 않고는 어떤 기준에 의한 것이니 처음부터 그것을 평가하거나 구분할 수는 없다.
우선 자기 자신이 먼저다. 자신의 정체성과 내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아니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집착과 탐닉으로 자신의 현세적現世的 욕구에 몰두하다가도, 그것을 이루지 못해 안달하고 때론 좌절감을 느끼다 가도 불현 듯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 던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는 중인가“ 아니면 나는 이곳에 왜 와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에 미치면 나는 현재의 내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나는 지금까지 왜 살아왔으며?” “왜 살고 있는 것인가?”하는 원초적 질문을 던지면 난 내 나이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나와의 질문이고, 스스로 답을 주고받는 것이니 비록 이런 때 아닌 문제인식에 당황스럽더라도 이를 의식할 타인들에 철저히 드러내지 않는다면 일단은 그 부끄러움만은 일시적이나마 피할 수 있다. 그러하므로 서둘러 어느 정도의 답을 찾고자 애쓰곤 한다. 무슨 소용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그간에 아마 희미하더라도 지속해 왔을 사고의 단편들을 이어가며 문제를 다듬고 그에 적절한 답을 준비해 가다 보면 나의 결핍과 헛된 공백이 조금은 감춰질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