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19.
1.
오래 전 인사동 한 복판 어느 골목길에 <歸天(귀천)>이란 작은 카페가 있었다.
다양한 차를 골라 마시는 곳이지만, 술을 마실 수 있는 주점이기도 했는데, 작은 공간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글을 쓰는 작가들을 비롯, 예술가들이, 그리고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그 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거나 사람들과의 한 때를 보내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나의 기억이 그러하다.
가끔 난 그곳에서 천상병 시인을 보곤 하였다. 주점 <귀천>은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운영하는 사업장(?)이었고, 주로 취해있는 듯이 보이는 천 시인은 그이의 남편이었다. 내가 인사동에 가게 되면 가끔씩 들르곤 하던 그곳은 세련된 공간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나름 운치가 있고, 어떤 특별한 정서가 실내 분위기를 감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귀천>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모르는 데,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는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남편 천 시인이 돌아가시고, 홀로 된 부인이 한동안 운영을 계속하다가 가게를 정리할 사정이 생겼을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와 살다가 언젠가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오래된 인식이다. 그래서 이 세상, 저 세상 하며 세계를 구분하고 죽음을 맞으면, 저 세상은 원래 이곳으로 오기 전 살았던 곳으로서, 이 세상에서 죽게 되면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그곳이며, 곧 이런 인식에서의 표현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중략)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歸天)」 첫 연과 마지막 연. 『창작과 비평(1970)』
천상병 시인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귀천(歸天)」을 통하여, 자신에게 닥칠 이 세상과의 이별을 미리 정리하여 놓은 셈인데, 한편으로 기구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 깊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울 상대를 다녔고, 명석하며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바라보곤 했던, 한 젊은이가 세상의 이치와 삶에서 터득한 사회적 정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하다가 불미스런 일을 겪게 된다.
2.
인생은 어느 시점에 갈라지게 된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내용은 그를 적절히 표현해주고 있다. 물론 인생의 선택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지만, 때론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도 인생은 갈릴 수도 있다. 이렇듯 인생은 간단하지가 않다. 즉 인생의 앞길을 예상하기도 어렵거니와 한 길로 죽 뻗은 길도 없는 것이다. 마치 숨어있다 나타나듯 어딘 가에 갈림길이 있고 어떤 식이든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은 누구도 예외가 없다. 두 길을 다 가볼 수도 없기에, 순차적으로 나누어 가본다 한들 시간의 소요가 필요하고 그것은 동시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니 분명 맛과 느낌이 다를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선택과 그로 인한 하나 길을 따라 우리는 당연하게 살아간다.
천상병도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으나 선택의 순간이 있었고, 분명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전제된 사건이나 기회가 주어졌다. 재능 있고 밝은 청년 천상병은 꿈에서도 바라지 않았을 길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었을지언정 피하기도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안타까운, 본인의 의지도 아니었기에 그 호소를 들어줄 이도 부재하며 무용하고, 안타까운 일이건만, 천상병은 스스로의 삶을 받아들이고 살았다. 그가 꿈꾸었을 삶은 어떠하였을까?
가보지 않았고, 가볼 수도 없었지만 청년 천상병이 꿈꾸었을 그 삶이 애처롭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름답고 착한 아내가 있었다. 누구보다 이해심 있었고 연민이 있었으며 계산적이지 않고 순수했던, 오빠의 친구인 천상병을 이해하고 보살피고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기를 우선하였던 천상, 천사와 같았던 색시, 목순옥(님). 아내 덕으로 천상병의 삶은 그나마 보상받았다. 잃은 것도 있었지만 반대로 얻은 것도 있었던 천상병의 삶이 균형 잡히도록 추를 달아준 묘한 인생.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총명하고 바른 천상병을 조금은 다른 이로 만들어 놓은 세상의 억압과 죄악들은 결국 바로 잡히게 되어 있으나, 천상병은 덕분으로 막걸리를 즐기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었다(지금까지의 이 내용은 내가 직접 알 수 있었던 내용이 아니다. 여러 기록을 통하여 알게 되었을 뿐이며, 다만 천 시인과 나는 많은 나이의 차이도 있고,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선의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나의 이해하는 바를 정리하였음을 밝혀둔다).
천상병은 혹시 남아있을 분노와 울분을 막걸리로 씻어내면서 틈틈이 시 쓰기를 계속하였다. 그의 재능이 그를 정돈시키며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던 바, 그가 겪은 끔찍하고 참혹한 시련이 시를 통해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득도한 사람의 그것처럼 승화되고 터득한 이치에 닿는 글들이 생산되었다.
그가 남긴 여러 시편들 중에서 수작으로 꼽힐 "歸天(귀천)"은 이런 중에 태어났다. 그가 예쁜 부인이 운영하는 주점 <歸天(귀천)>에 나와 아내가 건네는 막걸리 몇 잔에 혹 취기에 주정을 부리 듯 하여도 손님들조차 인상 찌푸리는 일이 없고, 아내의 이해심 가득 담긴 투정을 즐기듯 자신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깊은 성찰과 생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를 놓치지 않고 시로 완성하여 놓았다. 그리고 예고라도 하듯 신이 허락한 삶을 다 살아낸 후 사랑하고 고마운 사람들을 떠나 그가 온 곳으로 돌아가려는 순환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때를 누리고 기다리는 삶을 살았다. 누가 그를 막걸리 몇 잔에 취기를 표하는 사람으로 보겠는가. 한 많고 유감어린 생애에 대해 직설이 아니고 춤을 추듯 돌아가며 그 언중에 숨은 미학을 찾아내며, 원래 삶이란 왜곡 속에 신의 뜻이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로 부터도 환영받거나 위협하지도 않는 세속의 힘으로 부터는 멀어져 있었을 망정, 천상병은 언제나 사람들과 사람속의 삶의 원리를 탐구하며 자신을 억압하고 핍박한 세상을 떠나지 않으며 세상을 지키며 살았다.
“귀천”은 결국 누구나에 공통적으로 가야 하는 과정인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그를 따르고 터득하는 삶을 살며, 누군들 차이 있고, 누군들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의 삶의 뜻을 바라보며 지켜보며 이 세상에 소풍 왔다가 끝내면 결국 가야할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는 돌아가 자신이 했던 소풍을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려 한다고 한다. 돌아보니 과연 그러할 까? 속도 좋으시니 그렇게 말한다 하는 것일까? 남들은 알 수 없는 깊은 깨달음과 득도한 덕에 그럴 수 있게 된 것일까?
신께서 바라본다면 흐뭇해 할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천상병은 그래서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의 마음과 눈”을 가진 이라고 말하는 시인도 있었다(신경림,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몇 달 전 지인들과 인사동에서 식사약속이 있어서, 어느 식당에선가 식사를 하고 난 후, 장소를 옮겨 차를 한잔 하게 되었는데, 그 집이 곧 “귀천”이었다. 전보다 더 넓어지고, 깨끗하고 밝고, 위치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넓은 길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집의 메뉴판이나 실내의 장식된 것들은 오로지 천상병 시인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다시 환생한 듯 멀쩡히 사람들을 모아 활기를 띠는 장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미 주인공 두 분은 이 세상에 안 계신 것이 분명하니, 필경 다른 누군가가 운영하는 곳인데, 알아보니 그 분들의 조카라고 한다. 상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그 장소가, <귀천>이란 옥호를 달고 버젓이 예전 그곳(원래의 그 장소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손 떼가 묻고 익숙한 동네, 인사동의 그 어느 곳)에 살아 있다 하니 반갑고 좋았다. 기억 속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데, 이리 현존하고 있으니, 상상과 실체의 차이만큼이나 확실한 즐거움이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