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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화석 Oct 04. 2024

우공이산(愚公移山)

내 삶의 안쪽_16. 말콤 그래드웰 “아웃라이어”

김홍신 작가의 글에서 본 인도의 사례이다*.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2009, 해냄)    


신분사회가 오늘날에도 철저한 인도의 수드라 계급에 속하는 ‘다스라트 만지’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아내가 산에 갔다가 굴러 떨어져 머리를 다쳤지만, 치료할 병원과 약이 없었기에 제대로 조치도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을 바로 뒤에 있는 칼 바위산 너머에 큰 마을과 좋은 병원이 있었지만 그 산은 험준한 산세 때문에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였고, 산 넘어 읍내인 그곳으로 가려면 88km를 돌아 가야만 하는 오지에 살고 있었기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만지가 사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아로푸르 강’은 우기가 되면 강 건너 도시(비즈르 간즈)까지 반경 31km정도의 지역이 강물로 가득 차는 형편이었기에 이렇게 위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손도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게 되어 있었다.    


만지는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나자 곧 바로 망치 한 자루와 정 하나를 챙겨들고 길을 내고자 칼바위 산을 깨부수기 시작하였다. 그의 행동이 무모해보였기에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틈틈이 남을 일을 거들며 끼니를 해결하면서 그 일을 멈추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이 말려도 듣지 않으며 계속해 나갔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가당찮은 짓으로 여기며 오히려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기 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은 기적이 일어났다. 1960년에 망치와 정 하나씩을 가지고 시작한 그 일을 22년이 지난 1982년에 마침내 칼바위 산을 관통하는 길을 뚫고야 만 것이다. 총 길이 915m, 평균 너비 2.3m, 깊이는 최고 9m에 이르는 바위를 파내어 터널 길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오직 혼자서 바위를 쪼아내며 길을 내기 시작한 20대 후반의 젊은 청년은 22년의 시간을 들여 그 일을 하는 동안 늙고 궁상스런 중늙은이로 변하였다. 그러나 읍내를 가거나 위급하게 병원을 가기위해 88km를 돌아가야 했던 것을 이제는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수레를 끌고 갈 수 있게 바꾸어 놓았다. 

뒤늦게 인도 정부에서는 상금과 훈장을 주겠다고 한 모양이다. 그러나 만지는 단번에 거절하였으며, 다만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다시 마을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아로푸르 강’에 다리를 놓기 시작하였다 한다. 아무래도 바위산을 뚫을 때 보다는 더 힘이 들고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불가능을 가능하게 바꾸어 놓은 그 라면 반드시 해 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번에는 분명 그 만이 홀로 하지는 않을 것이며, 누구든, 또는 뒤 늦게 정부에서 나서서 다리를 놓고자 할지도 모른다. 


이 사례를 읽으며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대 속담이 떠올랐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이미 죽고 없는 아내를 위한 일인가? 분명 그렇지 않다. 더 이상 자신의 아내와 같이 어이없고 속수무책으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을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한 일이며,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환경을 탓하거나 변명을 찾아 물러서지 않고 부딪치며 문제를, 곤란한 일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 준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이 누가 보더라도 불가능한 일일 지라도 그 방법 밖에는 없다고 믿으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도전하고 시도해 보는 정신이 만든 거대한 위업인 것을 누구든 쉽게 알 수 있다. 인도의 ‘다스라트 만지’는 “우공이산(愚公移山)” 즉,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 는 말이 실제로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만인에게 확인 시켜 주었다. 곧 ”만지“스스로가 실제의 ”우공愚公“이며 결국 ”이산移山“을 해 낸 것이다.


사자성어四字成語의 교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로 몸소 보여준 살아있는 교훈에 대해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한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게 없는 것이다. 다만 세상의 비웃음을 받고, 그들의 편견과 따돌림에 외로움을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세상의 집단적인 열패주의劣敗主義를 가차 없이 깨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한때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가 화제의 책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가 말하는 “1만 시간의 법칙”은 숫자를 통해 메시지가 전달되고, 그 의미가 명확히 들어오고 가능성 여부가 머리에 그려지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행동적으로 반응을 보이기도 한 것 같다. 하루에 3시간씩 10년을 지속한다는 것인데, 이런 일을 하고 나면 세상에 안 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인생을 걸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누구든 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니, 문제 해결의 방법이 그리 어렵지 않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10년의 세월, 하루 고작(?) 3시간 정도라도 10년간을 꾸준히 지속하기란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의 인내심을 확인해본 사람들이 있다면,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이런 안타까운 조건에 기가 막혀 할 수도 있다. 


이 10년의 세월 단위는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편이다. 우리의 옛말에도 이 10년 단위의 시간 개념은 매우 일상화 되어 있다. “10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말은 다소 희화화된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10년 공부는 무슨 목표든 달성할 수 있는 시간길이의 공부라는 뜻이니, 완성이 가능한 기간을 의미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10년 세월이 결코 만만하거나 짧지 않다는 표현을 내포하고 있듯이 10년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끈기가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당연히 해 낼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도를 잘 하지는 못한다. 또한 곧 지루하게 여기거나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인생 별거 있나? 편하게 살다 가자하며 스스로에게 일방적인 명분을 주며 회피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도의 “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제로 실천을 해 보였다.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켰다. 물론 그는 22년이 걸렸지만, 그의 어리석을 정도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 될 때까지 하는 포기를 모르는 우직함은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현실적인 방법으로 하루 3시간을 몰두할 수 있는 자기관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속담에 나오는 우공으로서가 아니라, 따라서 잘 안 되는 어려운 일이어서 누구든 시도조차 못하는 발상이라는 것을 넘어서 현실적으로 하루 3시간씩 10년을 지속할 수 있도록 자신을 잘 이끌 수만 있다면, 인생에서의 낙樂과 보람을 원하고 때론 자신이 이룬 것이 없어 좌절하기도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희망을 갖도록 하는 방법론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못하고, 또  안 해 왔기에 새삼스런 말이긴 하다. 아니 진부하다 못해 한물간 이런 법칙을 왜 지금에 꺼내는 것인가 할 수 있으니, 좀 ‘뻘쭘’해 지기는 하지만 세상일에 새로운 법칙이 어디 있으며 몰라서 못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다, 모두 다 자기 자신의 게으름과 나태함과 방만함과 어리석은 착각 때문인 것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니니 세상의 우공愚公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우리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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