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17.
묘지명墓誌銘하면 쉽게 떠올려지는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시로 묘지명 때문에 거론된다. 영국의 극작가이며 비평가인 "죠지 버나드 쇼"이다. 그는 자신의 묘지명을 스스로 써 두었다고 하며, 그 내용이 “우물쭈물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라고 한다.
G. 버나드 쇼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름 세계적인 문호의 반열에 드는 작가인데다가 평소에 독설가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으니 이 정도는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유언 같지 않은, 또는 묘지명 같지 않은 이 묘지명에 열광하다시피 하였다. 한국의 대표 일간지의 칼럼에 인용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정신적 지주라 해도 될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 같은 성직자들도 언급을 하거나 자신의 글에 인용했을 정도이니 그 영향력이 대단하였다 하겠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게 이런 의역이 나왔나 싶게 사실과 다른 묘지명이어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의 조작이라고 할 수 있거나 의도적으로 희화화한 것이 역력해 보인다. 왜냐하면 원문을 읽어보면 분명 그런 해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생애동안 애쓰고 노력하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열망하였다. 스스로는 소설가로서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자 고군분투하였지만, 희곡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수많은 희곡작품을 남겼다. 또한 문학 뿐 아니라 미술, 음악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며 비평을 써서 비전문가인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비평으로 주목을 받았다. 오랫동안 유명 대중지에 고정적으로 평론을 썼고 특히 음악 평론은 그가 쓴 글들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작가의 어린 시절은 불운하였다. 중산층에 속한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하였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어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말았다. 이런 버나드 쇼이지만 스스로 공부에 열중하여 문학, 미술, 음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명성을 날리는 작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버나드 쇼는 자신이 이룬 성과에 만족하지 못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소설을 통하여 성공하고 싶어 했지만 희곡이라든가 미술과 음악에 대한 평론활동을 통해 이름을 날리게 되니 그의 만족도는 최대화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이다. 얻고자 하는 것은 멀리 있고 차선次善일 것들이 다가와 이루어진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또한 남들의 눈에는 그것조차 대단하고 부러운 일일 테지만, 당사자의 속 심정은 어찌 알겠는가? 아무리 평안감사라도 제 싫으면 안한다는 우리의 옛 말이 있는 것처럼 버나드 쇼의 심정도 그러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기회를 찾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70여 편에 달하는 희곡 작품을 썼으며, 여러 신문과 잡지에 미술, 음악, 문학에 관한 평론을 오랫동안 쓰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희곡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개성이 독특하니 그를 독설가요 풍자와 기지가 넘치는 작가로 만들었겠지만 그는 설렁 설렁 자신의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았다. 치열하게 살면서 94세의 나이를 향유享有한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버나드 쇼가 노벨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94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는 동안 후회하지 않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하며 살아간 그의 삶의 모습에 대해 존경하고 기린다고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묘지명에 자신의 삶과 인생을 조롱하듯 쓸 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영어로 된 원문을 찾아보니,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인데, 어떻게 그런 해석이 가능했는지, 누가 그런 해석을 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가 보여 준 모습만이 그의 본 모습이거나 전부가 아닐 진데, 그의 삶을, 비록 우리나라에 제한(制限)한다 해도 이런 식으로 희화화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뉘앙스nuance를 대중적으로 번역한다 해도, “내 언젠가 이 꼴 날줄 알았다”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인데, 즉 ‘아무리 애를 써도 오래도록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언젠가 죽음을 대하는 날이 올 줄은 알았다.’ 라는 뜻으로 나름 인생과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한정된 생명주기를 예측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인가? 너무 밋밋하고 모범답안 같으니 재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가? 그러나 “우물쭈물하다 그럴 줄 알았다.”라는 번역은 그가 94년 동안 살며 이룬 삶의 내용과 성찰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쯤으로 만들어 버린다.
버나드 쇼의 이 묘지문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청탁 글에 인용한 법정의 수필에서는 ‘삶의 종점에 이르러 허세를 벗어 버리고 알몸을 드러내듯 솔직해진’ 말로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일견 그런 관점도 있을 수 있겠으나, 나는 그런 면 보다는 즉, 자신의 생애동안 이룬 노력과 성과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에 대한 겸허한 자세로 더 뛰어나지 못하고 시원찮아서 아쉽다는 인식을 하는 듯이 여겨진다. 따라서 그가 평생을 우물쭈물 살았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감동을 준 예술작품을 수도 없이 남기고,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을 음악, 미술 작품들에 대한 쉬운 비평을 씀으로써 많은 독자들을 만족시킨 공적이 있는 삶을 산 그이다. 그런 것을 먼저 인정을 한 후, 다른 측면에서의 삶에 대한 성찰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설명의 고리 때문이라도 이와 같은 식의 의역된 묘지명을 그가 남긴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다소는 완화된 표현이라 할, “오래 버티다 보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번역한 것도 있었다. 이 역시 올바르다 할 수 없다. 그가 94세 라는 비교적 오래 산 사람이기는 해도, “오래 살려고 버텨보았으나 죽게 될 줄 알았다.” 라는 의미가 될 텐데, 이런 식은 밋밋한 번역일 뿐더러 그의 생명관을 오해할 소지가 있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대중적 주목을 받기는 어렵다고래서 본래의 뜻을 왜곡하는 일은 심사숙고 해야 할것이며, 일반인도 아닌 역사에 남을 인물의 평가는 제대로 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의 그 번역 묘지문은 신문의 칼럼이나 유명인들의 인용에도 불구하고 광고에 등장한 것만큼의 파급력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대형 광고주의 광고였다면 광고 노출 횟수가 엄청 났을 테니, 아마 대중들이 이 묘지명을 알게 됐다면 그것은 광고를 통해서 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원문과 비교하여 올바르지도 않은 묘지명을 왜곡하여 상업용 광고에 활용한 것이 된다. 이미 저작권의 시효가 지났으니 망정이지, 버나드 쇼의 집안에서 이 광고를 보기라도 했다면 고소라도 했을 만한 오역이거나, 희화화하여 광고의 목적인 ‘관심끌기용’으로 전락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생을 자기 방식으로 치열하고 진지하게 살다간 사람을 이렇게 사실과 다르게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버린다면 선대의 지성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싶다. 광고는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최대의 효과를 발생시킬 다양한 방법들을 강구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왜곡하고 조작하는 것도 크리에이티브creative라는 명목으로 치부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지성은 언제라도 포기되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대중의 허상이나 맹목적인 시류를 따르는 것 같아도 자신의 인식구조에 의거하는 바가 많고 그것에 어긋나는 경우, 정보처리와 같은 지식화과정이 발생되지 않거나 오류나 왜곡의 정도에 대한 반감도 발생할 수 있다. 만일 이런 광고를 만든 사람들이 세계적인 작가의 고뇌어린 진지한 삶을 이렇게 흐트러트린 것에 대해 의도한 것이거나 아니면 무식의 탓에 의한 것일 지라도, 버나드 쇼에 대한 무례를 넘어 심각성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묘지명의 번역과 원문과 다르다는 것과 그의 삶을 살펴보면서 그 일치성 여부를 최소한 따져보려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저 흥미위주로 감각적인 판단을 통해 만들어진 제작물이라면 그 여파에 대해서는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하겠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것들을 선택적으로 주목하며 지각하고자 한다. 그런 과정에서 누군가는 선택적 왜곡을 통하여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자 하기도 하며 결과적으로 진실은 멀어지고 결국 잘못된 정보와 지식이 남아, 그것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