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석의 '시간의 흔적'과 고영은의 '야생화'로 기억하는 '삶의 순간'
"삶의 순간"을 기억하는 "시간의 흔적“
≪인사동 국제아트페어≫에서 만난 작가들 -「한의석」과 「고영은」
우리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뜬금없다고 할 것인가? 시간은 생명이 창조된 이후 인류에 부여된 존재로서의 징표이며 선물의 표시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은 자연스런 인식이며 대응일 것이다.
6/12(수)부터 <인사동아트페어 2부>가 <갤러리 라메르(Gallery LaMer)>에서 시작되었다. 6월18일까지 한 주 동안 진행한다. <라메르(Gallery LaMer)> 1층 1관과 2층 4관을 전시장으로 쓰고 있는데, 지난 주(6/4~6/11)의 1부에 이은 행사다. 꽤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실은 소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되고 허용된 '시간'이라는 선물을 최대한 누리려고 애쓰면서 그 표시로 생산해 낸 자신들의 창조적 가치를 이렇게 증거물로 세상에 내놓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이런 곳에 와서 그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들의 정성스런 열정과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선(善)하고 지극한 소망을 담은 메시지에 자극받는다. 그 덕으로 경쾌한 발놀림과 마음까지 고조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마침 개막 첫날이니 다소는 들떠 있을, 기다림과도 같은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는 작가들의 세계가 저 마다의 색채와 형태로, 구상과 비구상의 조합으로, 다른 듯 개성적인 듯 전시장에서 드러나고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 것은 평소에는 쉽게 드러나 있지 않았을 법한, 새로운 열락(悅樂)의 메시지message와 사인sign들이 여기저기 떠돌고 있다. 그것들은 도시에서건 자연의 어느 깊숙한 곳에서건 조용히 머물고 있었던 것들이었을 것인데, 지금 이곳에 모여 축제를 벌이고 있으니 누구라도 가슴은 요동하고 어깨춤이라도 추어야할 판이었다.
그러한 시간들이 지금 이곳 인사동 "라메르"에서 흘러넘치고 있는 중이다.
「한의석」과 「고영은」은 ≪인사동아트페어≫에 참여한 작가들에 속하지만, 서로 무관한 작품세계를 가진 두 작가이다. 작품이나 주제의식에서 일단 관련성은 없어 보인다. 필자는 그럼에도 두 작가가 돌고 돌아 《시간》과 《삶의 순간》으로 엮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의석」 작가는 "시간의 흔적"을 주제로 일관된 도자기 조각공예 작품을 선보이고 있고, 「고영은」 작가는 “야생화”시리즈를 멋지게 그려내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간직한 “삶의 순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 완전할 만치 서로 다르지만, 두 작가는 연원적(淵源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
"한의석"은 건축가이고, 조각가, 공예가, 도예가, 화가, 또 엔지니어였다. 그의 다재다능한 재능은 분명 창조주가 허락한 천부(天賦)의 재주일 테지만, 초면의 얼굴에서 그리고 그가 잠깐 동안이지만 보여준 행동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는 선하고 진지하고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몰입하는 탐구자의 모습이었는데, 그가 주제로 내세운 "시간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삶에서 애쓰는 모습이 전시된 작품들에서 언제라도 겹쳐 보일 듯이 나타나고 있었다. 분명 그는 노력하는 천재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아마도 그가 "시간의 흔적"을 추적하려는 이유는 자신 몫의 삶과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고 지켜지고 있는 지에 대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성찰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비로소 50세에, 즉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게 되니, 누군가는 자신감을 더욱 느끼기도 했겠지만, 오히려 “한의석”은 반대로 자기 삶을 리뷰review하고 더욱 정진하고자 한 결심에의 반영이지 싶었다.
이번 전시된 작품들 대부분이 도예작품이면서, 목공예작품이면서, 또한 기계적 메카니즘을 결합한 엔지니어링engineering의 성과물이랄 수 있는데, 이 모든 이질적 재료와 도구와 표현 양식이 무엇인가? 싶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체 "한의석"이 추구하려는 정신은 굳이 구분한다면 어느 영역을 선택하려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점도 갖게 하였다.
이미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소재와 재료의 구분이라는 것이 방식의 편리함과 생각의 실용적 활용을 이유로 댈 수 있으나, 이는 기술 문명적 발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근래에 부각되고 있는 "융합", "통섭"의 개념을 떠올린다며, "한의석"은 행동적이고 센스sense가 뛰어나면서, 남보다 앞서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통섭적 정신을 실천하는 예술인이거나, 그 전형(典型)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의 미학적 솔루션(solution)에 있어서 거칠 것이 무엇인가? 신이 허락한 무엇으로라도 자신에 부여된 과제를 풀어내면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궁금증이 일었다. 인상도 밝고 착해 보이는 이 작가는 굳이 그간에 쌓아놓은 자신의 내공을 왜 내던지면서(?),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간 어렵게 터득하고 이룩한 기술과 방법들을 유지하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험난할 뿐인 길을 선택하고자 하는 것인가?
"한의석"이라는 작가는 자신에게 부여된 기득한 조건을 마다하고, 다시 파괴와 창조라는 미완의 길을 가기위해 굳이 놓여있는 곧은 길을 돌아서 가려고 한다. 분명 그도 계산할 만 하였을 텐데, 유리하지 않을 길을 선택하고 외롭게 자신만의 길을 가려는 것은 창작자의 뜻있는 구도적 수행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후일에 남겨질 "시간의 흔적"들을 위한 자신의 떳떳한 고행에의 결실로 대신하려는 것이라는 예상을 해본다.
그는 이미 이런 식으로 오랜 세월을 견디고 극복하며 자신의 과업을 풀고자 고뇌어린 수고를 하였던 듯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에너지는 넘치고,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써내려가는 중인 듯싶었다. 다행히 그의 의지마저 감당할 만하게 보태지니 “한의석”은 자신의 과업이 고난일지언정 기쁨으로 여기며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바치며 지속하는 중이다. 그런 시간의 흔적들이 지금 인사동의 전시실에서 대중들에게 선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한의석” 작가는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역무(役務)를 한편으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내보이는 중에 잠시 이곳에 머물면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던진 "시간의 흔적"을 찾아 나선 일들에 대해, 함께 독자들과 이야기 거리를 서로 나누고자 한다. 한편 이를 "음률(音律)"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어떤 원칙을 찾고자 시도하는데, 그의 방식은 친근하고 따사로우면서 현대적이고 친인간적이다. 그저 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통해서 시도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잘 들을 수 있는 도구, 효과적인 장치와 이 시대의 상징적 아이콘icon인 멀티미디어 비이클(스마트폰)을 필수의 도구로 이용하여 실제적인 방법까지도 작품으로 제시하고 있다. 누구라도 수용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상대에 대한 배려도 지극하므로 그 소통의 의도와 방식에 저절로 맞장구 칠 듯하다.
“한의석”은 사유의 대상에 대해 방법들을 탐구하면서 현실적인 방안까지도 고민하여 제시하는 친절하고 따뜻한 어머니(남성 작가입니다만~) 같은 작가이다. 그리고 “한의석”의 이번 전시 “시간의 흔적”은 현대에 이르러 인류가 맞닥뜨린 빠르고(speedy) 간편하며 효율적인 삶의 시간을 돌아보는 “한의석”의 “문화적 초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고영은」은 ‘야생화’를 그리고 있다. 그저(?) 자연의 어딘가에 흔하게, 숱하게 피어나는 야생화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을 듯하지만, 전시회에서 만났을 때, 그런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한편 작가노트에서도 관련된 의견이 없으니 단서를 찾기 어려웠지만 그림을 통해 현장에서 읽은 인식과 필자의 직관에 의존해 이해하고자 하였다. 어쩌면 고 작가가 자신의 예술적 과제를 굳이(?) 야생화로 선택한 것은 사물과 대상에 대한 평범한 발상에 의한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을 몇 가지로 나누어 해보기로 하였다.
「고영은」작가의 “삶의 순간”을 바라보는 3가지 시선
〇「고영은」의 ‘풍경화’같은 ‘정물화’
이런 장르genre의 구분이 가능한가? 자연의 현장을 틀(Frame)로 떼어내고 깊이 관찰하며 그리는 식의 “꽃그림”은 주목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고 무리이며, 그리고 전체를 상징하는 한 부분이니, 애초부터 정물화로 가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풍경화라 하면 근경(近景), 중경(中景), 원경(遠景)을 구상하고 대상의 배치를 주(主)와 부(副)를 나누면서 균형, 조화, 한편 대조를 통해 강조를 부각하기도 한다. 그러나「고영은」의 풍경화는 기존의 문법을 적용하기도 어렵지만, 그것을 오히려 무시(?)하니, 파격 아닌 파격의 미학이 드러난다. 또한 평등하다는 느낌이 강하니 세상에 귀하고 천한 것이 어디 있으며,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며, 모든 것들은 무엇이든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생명을 받았음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고영은」은 이런 인식으로 한편 도전적인 발상을 시도한 것인가? 모를 일이지만, 매우 신선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니 그는 용기 있는 작가라는 생각도 하게 한다. 아무튼 기존의 정물화는 사물을 작가의 입맛으로 배열하여 그려내었는데, 고영은 작가는 풍경화인 듯, 정물화인 듯 알 수 없는 장르 불문의 그림을 통해, 산비탈 어딘가에 군락을 이루며 흔(?)하게 피어있는 야생초와 야생꽃을 세심하게 주목하고 관찰하며 그려내고 있으니, 은근한 그의 실험적 시도가 필자를 놀라게 한다. 따라서 새삼스럽다. 그러면서도 조용히 소리죽여 존재하지만 자연의 생생한 율동이 살아있고 인공의 때와는 거리가 먼 아름답고 매혹스런 존재 그대로의 대상이 수줍게 말을 걸어오니 오히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며 마음은 들뜨고 만다.
〇고영은의 야생화 시리즈는, 작가의 섬세함이 미치는 곳은 어디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멀끔히 바라보고 기다리는 수더분한 ‘야생의 아름다움’, 그 진수를 찾아 나선 자연과학자와도 같은 시선으로 다가가고 있다. 혹 외로운 것인가? 아니면 외로움의 기억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외로운 존재를 찾아 나선 것인가? 아무튼 홀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향하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넉넉하고 진중하다. 가볍지 않게 마음을 담아 최대한 깊이 나누며 동행하고자 한다. 든든한 마음씨를 가진 후덕한 인간미조차 느껴진다.
이로써 “고영은”의 시선 속에 들어온 외진 곳, 사람의 눈길과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던 야생화 무리들은 작가의 사려 깊은 관찰을 통해 그가 구성한 시선의 틀(Frame) 안으로 옮겨와 드러나게 되고, 자연의 숨결까지 따라와 주니 금방이라도 생기를 뛰며 살아나게 된다.
〇바람은 자연의 숨결이다. 캔버스로 옮겨온 「고영은」의 야생화는 바람의 숨결을 불어넣으니 살아 춤을 춘다. 여전히 낯선 도회지에서는 낯을 가리 듯 요란하진 않으나, 생명의 기운과 흥을 거부할 수는 없다.
오래 전 시인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자화상>)이었다고 하였다. 예전부터 “바람은 생명의 숨결”이라고 하였는데, 자연의 원리를 터득한 사상가들의 가르침이다. 「고영은」의 그림에서 묘하게 전해지는 ‘바람의 기운’이 야생화를 살려내고 있다는 느낌이 이런 생각을 하게 하면서, 이미 그의 야생화 그림을 본 독자들을 여럿 자극했을 성 싶기에, 나만이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아가 바람은 갈대를 흔들며 수풀 사이 어울려있는 야생화를 휘감아 감싸 안고 있으니 붉은 빛의 들꽃들이 ‘고혹(蠱惑)’스럽기 까지 한다.
이처럼「고영은」작가는 주목받지 못하는 숱한 야생화들이 흩어져 피어있는 산비탈 어딘가를 자신의 시선으로 포착하여 자신의 틀(Frame)안에서 오래 된, 또는 새로운 스토리를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시각(視覺)으로 짜놓은 이야기의 구조는 부드러우나 강하고, 소홀하나 아름답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거리는 좁혀지고, 그 사이 작가 또한 ‘야생화스럽게’ 하나가 되어 둘 사이의 대화를 그려내니 그야말로 "아름답다"는 반응이 나오게 마련이다. 원래 "아름답다"는 "자기답다"는 뜻이기도 하니, 자연스럽게 "야생화스러운 아름다움"이 제격의 수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화폭의 배경으로 남겨놓은 여백의 틈으로는 독자들의 꿈을 새길 수 있는 여유를 내어주고 있으니, 바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못다 한 이야기를 마음껏 써내려갈 수도 있다. 이것은 고 작가가 내밀하게 간직하던 것이거나, 때가 되면 드러날 생애의 좋은 기대와도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그것조차 잊지 않고 있는 것은 그 야생화를 발견한 순간에 이미 이야기의 구조가 비롯된 것이라 추측을 해보게 한다. 그렇게 시선의 안과 밖에서 이야기는 완성되어가며 보다 더 부각되거나, 몽환적으로 계속 이끌려가는, 그래서 다소 길어질 수도 있는 시간의 흔적들이 그림 안에 채워지거나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공들여 그려낸 이야기를 독자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한다. 소통은 서로 상호적으로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므로, 작가의 그림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섞여 바람에 흔들리며 퍼져가는 중이다. 산들바람과 같은 자극적이지 않으나, 부드럽고 감미로우니 보여 지는 것들이 더 매혹적이다. 그림으로부터 시선을 떼기 어렵게 한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야생화 그림이다.
강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