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열화백의 60년을 따라가 보는 작품회고전
임창열화백의 60년 작품회고전 - 노(老) 화가의 60년을 따라가 보는 길
임창열 화백의 60년 작품회고전이 지난 달 5/22부터 5/27까지 갤러리 라메르(Gallery LaMer)에서 열렸다. 필자는 한달 전인 5/23일에 전시를 보았다.
60년을 작품에 전념한 생애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결코 쉽지 않은 역정(歷程)을 지나온 노 화백의 예술 활동 60주년을 맞은 인생에는 찬사가 필요할 듯하다. 아울러 60주년 회고전을 맞는 당사자인 노 화가의 심정은 어떠할까? 누군들 쉽사리 따라가기조차 어려울 것이니, 잠시의 시간동안 작가의 작품들을 일별할 뿐인 채로 노 화가의 한평생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회고전의 주인공은 겸허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가슴을 열어 제치며 손님을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갤러리 밖에서만 볼 수 있는 대략 50호짜리 중형 크기의 사과 더미의 작품과 꽃이 화려하게 만개한 사과나무 그림(100호 정도)은, 시간의 흐름과 결실의 과정을 상징하며 작품들의 정점을 드러내듯 하였다. 아울러 아름다운 계절 5월 하순에 빛나는 꽃을 맘껏 짊어 매고 손님을 맞는 자연의 성스런 미의식이, 초면일 뿐인 필자를 환영하고 있다. 이는 누구라도 자신의 세상에서 함께 어울려지기를 기대하는 넉넉한 초대의 메시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화가 인생 60주년을 회고하는 노 화백은 올해 나이 82세인데, 우리는 경로사상을 오래도록 받들고 있으나, 단지 년노(年老)한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신이 허락한 세월을 고스란히 자신과 자신의 소명을 지키고 받들며 지금에 이르기 까지 부단히 자신 몫의 삶에 충실한 까닭에서 인 것이다.
이러한 암시와 징표가 갤러리 라메르(GalleryLaMer)1층 1,2,3관에 전시된 그의 작품들에서 전해지는 것은 괜한 것이 아니다. 임 화백은 지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자신을 스스로 돌아볼 뿐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자신을 엿보이며 이를 함께 교류하고 공감하길 청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는 생애동안의 고민과 고통으로부터 즐거움과 희열, 행복 등 감정의 기복들을 모조리 표출하고 그 결과를 이곳에서 모두 보일 수는 없어도, 드문드문 그 암시와 상징으로, 그리고 주목을 요하는 방식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이끌고 있다. 이제는 무엇에라도 자유롭고 편안하다. 지난날에 나름의 고통과 갈등, 말 할 수 없는 욕망과 성취에의 갈망이 있었을지언정 지금은 그야말로 달관한 지경에 이른 수준에서 자신의 세계에 당당하다.
임창열 화백이 지난 세월 겪은 삶의 편린(片鱗)들이 일부일망정 여기 라메르갤러리에는 연대기처럼 펼쳐져 있다. 비교적 젊은 시절에 病魔(병마)에 시달린 경험은 오히려 지나고 보니 극복과 성장의 바탕이 되었으며, 또한 젊은 청춘이 잠시라도 겪었을 실망과 고통은 자신의 성숙한 내면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의 이동은 낯익은 것과의 이별이면서, 서투름과 낯 섬으로의 대체가 되었을망정 새롭게 사랑과 인간의 정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 삶의 길, 자신과 많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운명의 길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직접 달래고 터득해 가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깊이와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이런 것들은 모두 자신의 체험과 터득으로 만들어 낸 것이어서 그야말로 내공이 쌓이는 성숙의 시기가 된 셈이었다.
비록 그의 20, 30대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어서 힘이 되었을지라도 힘겨웠고, 양 어깨와 가슴은 무거웠다. 그러나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창조의 대상들, 피할 수 없는 사물들과 마주하며, 그것들을 소통의 상대로 하여 극복하였고 그래서 이 시기의 그림들을 대체로 긍정적인 요소들을 선택하고 표현하려 하였지만, 오랜 사색과 자기와의 성찰 과정이 길어지는 만큼 채색의 중첩과 반복에 의해 다소 두텁고 무거워져 있었다. 그리고 바라보는 것들의 깊이를 관찰하려 쉽게 지나칠 수 없었으며, 많은 것들을 또한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사물과 자기와의 거리 사이에는 많은 것이 놓여 지기도 하였다. 더불어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닌 대상의 이면들이 화폭에 드러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의 순수가 만든 솔직한 관찰에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생애든 뜻하는 대로 평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에든 영향변수가 있게 마련이며, 이를 마주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태도는 각기 다르기도 하고 그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거쳐 가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성과가 나뉘게 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될 것이다.
임창열 화백은 4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전환점이라 할 시기를 겪은 듯하다. 아마도 유성 “장터” 그림은 이런 전환기에서 어떤 식이든 영향을 끼친 작품일 것으로 필자는 판단하고 싶다.
이 작품은 젊은 시절의 마인드mind와 태도의 연장선에서 그려진 그림이라 할 수 있으며, 어느 정도는 수작(秀作)임이 분명하다. 기본적인 표현기법과 주제의 전달능력에서도 이미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는 어둡고 편향됨을 느끼게 한다. 원숙미가 다소 부족했다고 할까, 아니면 솔직하고 바르게 대상을 대하다 보니 오히려 확장된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한 것인가? 이런 반응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어 오해의 여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화폭의 촌노(村老)의 시선이 그대로의 순수한 눈빛이 아닌, 매서운 눈매의 호소력이 부각됨으로 해서, 촌노의 진심어린 표정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대변인으로의 역할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으로써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원하는 곳으로 모아지지 못했다. 자연스러울 뿐인 시골 장터의 리얼리티가 훼손되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작가의 생활터전이기도 한 충청도 유성의 어느 장터 풍경을 리얼하게 재현하여, 농촌 대중들의 삶과 생활 현장을 애환이 느껴지면서도 수수하게 전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선택된 촌노의 인상이 강렬한 만큼 주변 요소들과의 시너지가 발휘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누군가는 촌노의 분노가 느껴지는 눈매나 불만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정작 시골장터에서 찾을 수 있는 정서보다는 사회적 불안감을 인식하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화위복인 것은 이 작품이후에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그려지고 있다. 밝고 건강해 보이는 자연의 풍경과 이미지들이 매우 자연스럽고 안정적으로 그려진다. 아마 그가 그동안 매달렸던 주제의식과 그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 그 과정에서 몰입되었거나 빠져들었던 우울함이나 갈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에, 자신을 감싸고 있던 중압감이나 무게로부터 벗어나 가볍게 멀리 더 너른 대상과 세상으로 향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임창열은 결국 ‘장터’이후, 50세를 넘기면서 하늘의 명(命)을 깨치며 자신의 과업을 알아차린 듯하였고, 그리고 사과나무와 사과를 통하여 갈망하던 세계와 만나게 된 듯하다. 그는 사과를 그리면서 사과는 세상의 온갖 풍파와 도전을 겪어내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오래 전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꽃이 핀 과일 나무를 최대한 많이 그리고 싶다”고 하였다. 꽃이 핀 과일 나무는 그 화려함도 좋지만 꽃이 피고 진 뒤에는 과실을 남기는 것이니, 연 이은 기쁨을 기대할 만한 것이다. 임화백은 비로소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창열 화백은 이렇게 터득한 깊이 있는 시선으로 비교적 따스하고 인간미 있게 자신의 뜻에 다다른 듯, 다양하게 사과연작을 그리기 시작한다. 지나온 과거의 보상인 듯, 자신의 예술세계를 찾아 꽃을 활짝 피우고, 그 과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임창열에게 사과는 오랜 기간 남모르게 고민하고 애태우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다가 가려고한 자기만의 세상에서 발견한 결실이었다. 한 알의 사과로도 자신이 터득한 원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지만, 한편 세상에 대해 얼마든지 자유롭고 임팩트있게 보여주기 위해 수백, 수천의 사과를 쌓아놓고 그리기도 한다. 그의 넉넉함이고 또 자신감의 표시이다.
그러하니 그의 후기 그림들에서는 빛이 나며 건강하고, 힘이 넘쳐난다. 또한 포근하고 소박하다. 원래 임창열은 그런 사람이었고, 60년을 수양하듯 그림을 그려오면서 더욱 그렇게 완성되었다. 전시장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 ‘활짝 꽃이 핀 과수나무’처럼, 지금 임창열 화백의 작품세계는 환하게 빛나고 있다. (강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