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덕 화백 초대개인전, "풍경이 있는 랩소디"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1층 그랜드관), 2024 10/16~10/29
강위덕 화백의 초대 개인전이 인사아트 프라자 갤러리 1층 그랜드관에서 10월 16일(수)부터 29일(화)까지 열리고 있다. 강위덕 화백의 이 특별한 전시 “풍경이 있는 랩소디”는 50여 전시작품들 대부분이 풍경화인 까닭도 있고, 자연과 경치를 화폭에 담은 강 화백의 화풍이나 사상적 배경이 어느 정도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측면이 전해지므로 주제의식이나 형식면에서 적절한 선택이라 할 만하였다.
강위덕 화백은 80대 중반의 노장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다소 낯선 신비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40대 초반의 나이에 도미(渡美)하여 40년 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 활동하였고, 그림 뿐 아니라 교향곡을 포함하여 다양한 형식의 악곡을 다수 작곡한 작곡가이며,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이미 여러 권을 시집을 상재한, 그야말로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예술 활동을 하는 ‘종합예술인’이기 때문에 강위덕 화백을 단순하게 정의하고 평가하기 어려운 정체성을 가진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을 가진 강 화백이 1980년 자신의 첫 개인전이후 무려 44년 만에, 그리고 40년의 미국에서의 활동 이후 귀국하여 처음으로 국내에서 여는 특별한 전시회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할 것이다.
강 화백은 간단한 수사와 설명으로 정리하기에는 다소 복잡하고 특별한 정체성을 가진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화가이면서 조각가이고, 교향곡을 포함 다양한 악곡들을 작곡한 작곡가이며, 이미 30년 가까이 시를 쓰고 있는 시인으로 어느 하나의 장르와 특정 경계에 속하지 않는 다중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가일 뿐 아니라, 화가로서의 작품 활동 역시 그간 범주와 사조(思潮)에 있어 다양한 경로와 과정을 겪어낸 실험과 파격의 상징성을 보여 왔다고 할 수 있기에, 여느 화가, 보통의 예술가들과는 결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강위덕 화백은, 특정한 범주에 포함하기도 어려우니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표현하는 인간)’로서 다양하고 복잡한 예술적 배경과 특성을 가진 새로운 전형의 예술가의 면모를 가진, 또한 지난 세기 현대를 대표하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언급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형 『노마드(Nomad)』의 전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강 화백이 가진 예술적 정체성측면이나, 그동안 60년을 훌쩍 넘는 화가로서의 이력을 살펴봐도 대개의 화가들과는 다른 과정을 지나온 특이한 예술적 재능이나 결과를 볼 때, 그가 보여주는 실험, 혁신, 파괴적 창조 정신 역시 일반의 잣대나 시각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차별되며 간단하지가 않은 것이다.
강화백은 젊은 시절부터 1980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주로 동양화를 그리면서, 활발히 단체전에 참여하거나 개인전을 통하여 자신의 재능과 개성을 보여준 바 있다. 1980년 강 화백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동양화 개인전을 개최한바 있었는데, 당시 이경성 미술평론가는 강위덕의 작품들에 대하여 “원시적인 아픔, 근원적인 아름다움까지도 철저하게 파악하려 하며, 세파에 깎인 돌멩이 하나에서 조차 삶에 얼룩진 흔적을 놓치지 않으려 하면서 추하기 짝이 없는 물체에서도 깊숙이 내재한 미의 본질을 찾아낸다.”고 평가한 바 있었다. 이미 강 화백은 화단 입문 초기에서부터 이러한 예술관과 인생관으로 자신의 작품을 그리면서 자기만의 세계에 경도(傾倒)되고 있었던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강위덕 화백의 작품세계는 간략하게 핵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가 자신의 다양하고 복잡한 내면을 지나온 정신적 표상representation을 드러내고 있고, 60여년의 화업의 역정(畵業 歷程)을 지나오면서 겪은 여러 변화들을 엿볼 수도 있으며, 또한 일반의 사고와 달리 그 폭이 넓고 깊다고 해야 하니 단순한 관점으로는 종잡을 수 없을 만하다.
또한 그간에 강 화백이 관심을 기울인 대상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뿐 아니라, 표현의 도구와 방식도 일정하지가 않으니, 이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논리와 이론을 빌려온 들 장황해지거나 적절히 꿰어 맞추기도 어려워 보인다. 다만 필자는 이번 전시에 걸린 50여점의 작품이 그가 평생 그린 작품의 일부에 해당할 지라도, 그래서 그를 설명하기엔 충분하지는 않을 지라도 부분적으로나마 그의 관심대상과 화법을, 그가 기울이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조금은 짐작해 보고자 하였다.
이번 전시가 “풍경이 있는 랩소디rhapsody” 라 했으니 풍경화가 주된 테마화 되어 있지만, 그의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거리의 노숙자’, ‘호텔의 메이드’, ‘인디언(?) 소녀’ 등 사회적 약자일 수도 있는 이들을 정성스럽게 관찰하고, 관심을 기울이면서 연민의 마음을 나누려고 한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과도 정감 넘치는 마음의 교환(交歡)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평범해 보이는(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대상에 대한 온후함이 전해진다. 그리고 관능적이기까지 한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마저 숨기지 않고 있으니, 그는 우선 사회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작가는 곧 삶의 현실에 바탕한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신이 창조하여 인간에게 허락한 자연으로 시선을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단순히 자연과 풍경에 대한 찬미만이 아닌, 자신의 영적 체험을 담아내고자 하는데, 초기엔 목가적(牧歌的)인 자연으로 부터 위안과 마음의 평정을 교감하였을 테지만, 차츰 어느 곳에서든지 자연으로부터 ‘무언가’의 기운을 감지하게 되며, 서서히 그를 찾아 나서거나 함께 하고자 하는 몰입과 이입을 시도한다. 그 결과로 그의 풍경화에는 겉으로 보여 지는 자연의 아름다움, 즉 장엄하면서 신비하고, 인자하지만 때로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천진한 이미지를 재현하면서도 마치 구도자와 같은 태도로 자신의 영성을 담아내려는 깊은 호흡을 담기 시작한다. 이것이 강위덕의 풍경화가 여타의 작가들의 그것들과 다른 느낌과 자극을 주는 이유이다.
그의 작품들에는 숨겨져 있는 듯한 기운이나 스토리story가 배어 있다. 따라서 작품을 대할 때 평소처럼 마치 행인이 길을 걸어가며 기웃거리듯이 작품을 봐서는 안 된다. 작품 앞에 멈춰 서서 자신의 다양한 시선과 자세로 대화하듯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으로 잠시 건너가 보려는 마음으로 교감을 시도해 본다면 다소라도 영성적인 샤워링(showering)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풍경화를 강위덕은 매우 극 사실주의(hyper-realism)적으로 그려냈지만, 나아가 ‘엠페스토 기법’(입체감을 살리고 실제적 표현을 위해 시각적 이미지(착시)가 아닌 물적 실체를 인식하도록 의도하는 제작기법-필자 주)으로 그려내니, 당장에 작품이 실제의 한 부분이거나 눈앞에서 실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설치미술적인 3D현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데, 그의 작품들 중에는 소나무의 일부를 그대로 캔버스에 고정하고 이에 물감 등으로 채색하여 작품화하기도 했으며, 이는 매우 놀라운 실험적인 시도이면서 작가의 거침없는 창의적인 예술정신의 구현인 셈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강 화백은 자신의 예술을 위해 자신의 작업정신과 방식조차도 고정화 하지 않는다. 그에게 장르와 기법과 사조는 의미가 있다고 해도 거리낄 무엇이 아니다. 따라서 그에게 이미 구분되어진 영역이나 경계는 소용없는 잣대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예술의 자유로움과 창의성을 위해 그 무엇에도 고착화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한편 그의 작품들은 대상의 멀고 깊은 세계를 담아내려 하는데, 그래서 먼 시야 속에 깊은 통찰을 포함하는 여러 단계의 세상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다양하고 복잡해보이지만 이미 세상이, 우주가 그러하니 특이한 일도 아니다. 최근에 강 화백은 오늘날 펼쳐지는 디지털문명의 새로운 현상을 화폭에 담고자 한다. 그에게 ‘메타버스(meta verse)’는 신문명의 기술적 트렌드trend이거나 개념이 아닌, 진즉에 시도하고 있었던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에 대한 통찰의 데쟈뷰(deja vue)적 주제였다. 그의 우주관의 발로인 셈인데, 다양하고 이질적인 오브제objet를 선택하여 그것들의 관련성과 밀접한 관계의식을 2차원 캔버스canvas에 담아내고 있다. 끝도 없는 시공간적 우주의 원리에 대한 무모한(?)관심과 시도처럼 보이지만, 강 화백의 ‘유목적nomadic 사유’가 자신을 이리 이끌고 있다. 그의 노령(?)이 무색할 선도적인 혁신이며 개척이다.
그러나 이렇게 긴 안목을 가진 강 화백은 느닷없이 “접사(close-up)”의 개념으로 자연을 관찰하기도 한다. 소나무의 줄기를 확대하고 주목하여 그려내거나, 소나무 숲의 어느 부분들을 가까이 들어다 본다는 것은, 그간에 시간적으로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자연이라는 대상의 끝을 실눈 뜨고 바라보려 했던 그가, 또는 설악산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그려내기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서 오래 묵혀 그려낸 내경(內景)을 새의 눈으로(조감鳥瞰) 투시하며 12년에 걸쳐 웅대한 자연의 미를 그려낸 노 화백이 갑자기 ‘접사의 시선’으로 작품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시선이 먼 곳과 가까운 곳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긴 하지만, 그만의 특별한 사상을 담은 상징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즉 넓고 긴 시선을 망원경으로 보다가 갑작스레 현미경을 들이대듯 눈앞의 사물을 관찰한다는 것은 평소의 합리적 태도를 뒤엎는 ‘불합리적 충격’이기도 한데, 이로 인하여 작가 스스로를 위한 자극이면서 독자(관람자)에게도 특별한 반응을 야기할 인상적인 체험을 제공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실존을 확인하려는 시각적 징후symptom의 일종이며, ‘특수한 체험’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강 화백은 자신의 예술적 에너지를 다채롭게 수단이나 방식을 초월하여 표출하면서 자신의 예술혼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다.
지난 수요일(10/16) 필자는 전시회 개막식을 겸한 특별공연에 참석하였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고 그간 해온 자신의 종합적 예술활동의 일부라도 선보이는 것은 관람자들에게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노 예술가 강위덕 화백은 국내 연극계 대표연출자인 장두이 배우의 기획으로 전시장에서 2시간의 공연을 펼쳤다. 갤러리에서 벌어진 놀라운 종합예술의 무대가 특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는데, 40년 만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만나는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한 노장의 선물과도 같았다. 그의 노래와 시는 사람들과 사회와 고국과 인류와 나아가 창조주에 대한 헌사이고 그의 진정성있는 마음의 표현인 듯하였다.
이렇게 40여년 만에 인사동에서 다시 펼치는 그의 “풍경이 있는 랩소디”에서 필자는 청년의 기운을 가진 노장에게서 여전히 미래를 향하며 창조의 열망을 가진 채 “유목적nomadic)” 출사표를 새롭게 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이 특별히 허락한 천부의 재능을 평생 멈추지 않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연마하면서, 신의 뜻을 소홀히 하지 않고 신에의, 생명에의 경건함과 외경의 태도로 자신의 역무를 다하는 노장의 아름다운 랩소디에 함께 기꺼이 동화하였다.(강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