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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별 Nov 30. 2020

혈의 목적

뽑고, 바치고, 팔고, 빨리고

한 달 전 베트남 하노이 소재 병원을 방문했다. 매년 한국에 들어가서 받던 건강검진이 올해는 코로나로 어렵게 되어 현지 병원을 이용하게 된 것이다. 의료의 수준차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채혈 방식만을 놓고 볼 때 양국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맥주잔 정도의 피를 뽑은 것 같다. 건강을 논하면서 술잔을 떠올리다니 한심하다. 피를 뽑기 위해 주삿바늘을 찔러 넣을 때 나는 빤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경험이 많은 간호사인 것 같다. 나에게 말을 걸어가며 능숙하고 순조롭게 작업을 마쳤다. 나는 그 피로 내 건강상태를 알아볼 참다. 나는 흔쾌히 소중한 피를, 그것도 돈을 내고, 뽑히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처음 피를 뽑 경험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중앙도서관이었나 사회관이었나, 그 앞 공터에 적십자 헌혈 버스가 주차해 있었다. 나른한 봄날, 인생이 그 날씨보다 더 나른하게 느껴지던 나는 친구들과 그 버스에 올랐다. 몇 가지 문답 후 서류에 서명을 하고, 기저귀 고무줄 튕긴 팔에 바늘을 꽂고, 주먹을 쥐락펴락 하며 링거줄로 흘러나가는 피를 감상했다. 헌혈 장려 비디오도 틀어 놨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내용은 피가 항상 모자라며, 너의 피가 소중한 생명을 구할 것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헌혈을 하라는 것이었다. 거기서 맥주캔 하나 정도의 피를 뽑은 것 같다. 나른함을 달래기 위해 찾았던 헌혈 버스에서 다시 내릴 때, 내게 남은 건 단팥빵과 우유, 그리고 아까보다 더 깊어진 나른함이었다.  그것은 자발적 피 뽑기의 시작이었다. 부디 내 피들이 좋은 일에 쓰였기를 바란다.


EBS 라디오는 책을 읽어준다. 십여 년 전 어느 주말,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던 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빠지게 된다. 그는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許三觀 賣血記' 속 허삼관이다. 그는 다소 헤설프고 얼핏 생각 없어 보이고 짐짓 재치 있게 보이지만 또 상당히 쩨쩨하다. 그는 우연히 피를 팔아 돈을 버는 법을 알게 된다. 또 피는 하루에 생맥주 500CC 정도 되는 사발만큼만 뽑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는 돈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결혼을 계획하고, 허옥란과 결혼하여 아들 셋을 낳는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그들을 할퀴고 지나가지만 그들 다섯 가족은 어떻게든 함께 살아남는다.

병으로 쓰러진 장남을 살리기 위해 그는 생명을 위협받으면서도 피를 판다. 하루에 몇 사발씩 피를 뽑아 병원비를 만든다. 그를 이렇게 책임감 강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탈바꿈시킨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아버지'였다. 숭고한 그의 행위에 불구하고 유복한 시대를 사는 나는 사람의 피가 그렇게 위험하게 사고 팔려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또 어디선가는 살기 위해 사고 팔리는 인간과 관련된 것들이 존재한다. 존엄성, 도덕, 위생 등의 이유로 국가가 막아서는 그 삶의 영위와 관련된 개인의 결정들을 과연 우리는 통제할 수 있을까?


덧없이 피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다. 흡혈에 관한 이야기다. 동방불패에서 흡성대법에 당하면 그 대상은 아무런 보상 없이 마른 송장이 되어 죽게 된다. 좀 양심적인 쪽은 서양인데 뱀파이어나 드라큘라에게 흡혈을 당하고 나면 인간성을 잃게 되지만 반대급부로 힘이나 영생을 얻게 되는 구조다. 최근 드라마 킹덤에서는 조선시대지만 좀비 형태의 전염병으로 흡혈이 묘사되었다. 흡혈의 경우는 글쎄, 그 양이 맥주 1,000 CC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완샷이 가능한.


흡혈은 꼭 물리적으로 피를 빠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이용 또는 조종하여 이익을 취하는 상황을 비유하기도 한다. 착취라고도 한다. 그 강도가 그렇게 심하지 않을 때는 빈대나 거머리 같은 생물체를 등장시켜 비유한다. 하지만 범죄를 구성할 만큼 심할 때는 점진적으로 사용이 금지되고 있는 빨대가 등장한다. 그 경우 피해자 영생 따위의 반대급부는 없고 마른 송장 쪽  가깝게 된다. 인간이 뱀파이어보다 못한 것이다. 현실이다.


내가 건강히 살려는 채혈이든, 남을 살리려는 헌혈이든, 삶과 가족을 유지해 보겠다는 매혈이든, 그 목적에 사람이 있다. 며칠 전 삼관 옥란을 정우 지원이 연기한 한국영 '허삼관 매혈기'를 보고 이 모든 것이 떠올랐다. 중국인지 한국인지 애매한 설정에 오히려 영화의 집중도가 높아진 느낌이 들었다. 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불문하고 세상의 흡혈 또한 여전하다.


허삼관은 피를 팔고 난 후 돼지간볶음을 먹어야 한는데, 나는 글을 쓰고 난 후 순대에 소주가 당긴다. 나도 참 대책 없다. 허삼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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