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라이프 Aug 02. 2024

현대판 헨젤과 그레텔

유기견도 아니고 아들을 버려?

    내가 살았던 외딴터 과수원은 그 흔한 학습지교사 하나 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자란 아들은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채로 초등학교 입학을 해서 담임선생님이 난감해하셨을 정도였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기도 했지만, 기본지능은 어느 정도 있으니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는 오만한 자신감으로 방치한 면도 없지 않았다. 예민한 아이는 너무 긴장하고 평소 입도 짧아 안 먹던 음식도 잘 못 먹고 해서 급식시간에도 야단맞곤 할 정도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다소 시간을 필요로 하는 아이였다.


     가족끼리 그 흔한 동물원 한 번 놀이동산 한 번 가 보지 못하며 자란 아이인데, 어느 날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서울 과학관에서 전시 중인 <인체의 신비전> 관람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난 내심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어 과수원 일은 걱정 말라며 버스터미널에 까지 바래다주고 왔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오고 가는 시간이 있는데, 오후 일찍 남편이 돌아왔다. 그런데, 같이 데려간 9살짜리 아들이 옆에 없었다. 숙기도 없고 서울은 시댁말고는 가 본 적이 없고, 더욱이 버스는 타본 적이 없는, 문명사회의 경험이 누구보다도 없는 아들더러 혼자 더 전시회 관람하고 지방에 있는 외딴터 과수원집까지 찾아오라고 두고 왔다는 얘기였다. 자신이 급한 일이 있고 혜화역까지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줬고 차비도 넉넉히 줬다며-빠듯한 5000원이었음- 자기의 패륜적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과학관에서 혜화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은 얼마나 어렵고, 글씨 겨우 읽는 아이가 뭘 안다고 고속버스 타고 지방 외딴터에 있는 과수원까지 찾아오겠는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따지며 울다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당시 핸드폰은 지금처럼 아이들까지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그냥 아이를 잃어버린 것 같은 아니 유기해 버렸다는 표현이 더 옳을 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시댁이 서울이라 시어머님이나 시동생에게 부탁해도 될 것을 혼자만 내려올 수 있었던 그 박정한 무모함과 가치관의 기이함에 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행동들에 대한 반성과 미안함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인체의 신비함이 아닌 남편인성의 신비함(?)-이런 희화적인 표현으로나마 나의 그때의 고통을 좀 경감된 채 느끼고 싶다-그 자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빠를 무서워한 탓에 어떤 이의 제기도 못하는 아들이지만, 얼른 밖으로 나와 행인 중에 길을 물어 도움을 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만난 착한 대학생 형이 터미널까지 데려다주고 고속버스까지 자기 돈으로 표를 사서 태워 주었다고 한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느 버스를 타고 갔다고 도착시간까지 알려 주었다. 나는 남편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악한 세력을 방어하는 선한 의도들의 연합, 기도의 힘과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다. 당시 신앙생활은 내게 사치일 정도로 정신없을 정도였고 교회는 못 나가고 있었지만, 내 아픈 삶 속에서도 소중한 기회들을 통해 선한 역사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하신 건 모두 엄마의 기도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험은 아이에게 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트라우마 이면에, 적지만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하나의 경험을 얻었다는 사실은 그나마 그 와중에도 감사한 일이다.

    가족이라고 다 가족은 아닌 것이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채, 사생활이라는 덮개로 가리어진 고통들이 얼마나 많은 지, 그리고 지금처럼 제도적인 사회적 안전망이 어느 정도 구축되지 않았던 시절엔, 이혼이라는 단어의 주홍색 볼드글씨체에 두려움을 느꼈던 시절엔, 꼭 힘없는 무지에서가 아니라 학습된 무기력감에서 비롯된, 포기한 듯한 삶들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지금이라도 공동체 속의 이웃들의 아픔과 흐느낌, 비명소리에, 아니 가청진동수를 벗어난 침묵까지도 그들의 작은 몸짓도 귀 기울여야 한다.

    물론 그때의 엄청난 아픔의 기억들은 아이들의 마음 구석구석에 가시처럼 박혀 있지만, 스스로의 방어기제를 사용해서인지 그냥 주어진 하루하루를 아프면서도 잘 살아내 준 아이들이 참 고맙다. 자랑스럽다.

아직도 그 상처들이 보이지만, 커가고 있고 마음도 성장해 가면서 스스로 상처를 다루고 있음에 감사한다.






  


아들


트라우마


과수원




메뉴모바일 미리 보기 맞춤법 검사



글쓰기

알림



내 브런치스토리


작가의 서랍


통계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글 읽는 서재


피드




설정


로그아웃


 에디터 진입" t-section="write" t-page="editor" t-action-kind="ViewContent" data-tiara-id="74" data-tiara-name="극한 결혼 05" data-tiara-category="조이라이프" data-tiara-category_id="luckykim1207" data-tiara-author="조이라이프" data-tiara-author-id="@@9ZhV" style="color: rgb(51, 51, 51); font-family: "Noto Sans DemiLight", "Malgun Gothic", sans-serif; font-size: 14px; font-style: normal; font-variant-ligatures: normal; font-variant-caps: normal; font-weight: 400; letter-spacing: normal; orphans: 2; text-align: start; text-indent: 0px; text-transform: none; widows: 2; word-spacing: 0px; -webkit-text-stroke-width: 0px; white-space: normal; text-decoration-thickness: initial; text-decoration-style: initial; text-decoration-color: initial;">

    내가 살았던 외딴터 과수원은 그 흔한 학습지교사 하나 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자란 울아들은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채로 초등학교 입학을 했고 담임선생님이 난감해하셨을 정도였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기도 했지만, 기본지능은 어느 정도 있으니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는 오만한 자신감으로 방치한 면도 없지 않았다. 예민한 아이는 너무 긴장하고 평소 입도 짧아 안 먹던 음식도 잘 못 먹고 해서 급식시간에도 야단맞곤 할 정도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다소 시간을 필요로 하는 아이였다.


     가족끼리 그 흔한 동물원 한 번 놀이동산 한 번 가 보지 못하며 자란 아이인데, 어느 날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서울 과학관에서 전시 중인 <인체의 신비전> 관람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난 내심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어 과수원 일은 걱정 말라며 버스터미널에 까지 바래다주고 왔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오고 가는 시간이 있는데, 오후 일찍 남편이 돌아왔다. 그런데, 같이 데려간 9살짜리 아들이 옆에 없었다. 숙기도 없고 서울도 가 본 적이 없고, 더욱이 버스는 타본 적이 없는, 문명사회의 경험이 누구보다도 없는 아들더러 혼자 더 전시회 관람하고 지방에 있는 외딴터 과수원집까지 찾아오라고 두고 왔다는 얘기였다. 자신이 급한 일이 있고 혜화역까지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줬고 차비도 넉넉히 줬다며-빠듯한 5000원이었음- 자기의 패륜적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과학관에서 혜화전철역까지 가는 길은 얼마나 어렵고, 글씨 겨우 읽는 아이가 뭘 안다고 고속버스 타고 지방에 있는 과수원까지 찾아오겠는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따지며 울다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당시 핸드폰은 지금처럼 아이들까지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그냥 아이를 잃어버린 것 같은 아니 유기해 버렸다는 표현이 더 옳을 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시댁이 서울이라 시어머님이나 시동생에게 부탁해도 될 것을 혼자만 내려올 수 있었던 그 무모한 대담함과 가치관의 기이함에 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인체의 신비함이 아닌 남편의 인성의 신비함(?)-이런 희화적인 표현으로나마 나의 그때의 고통을 좀 경감된 채 느끼고 싶다-그 자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가 길을 묻다가 만난 착한 대학생 형이 터미널까지 데려다주고 고속버스까지 자기 돈으로 표를 사서 태워 주었다고 한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느 버스를 타고 갔다고 도착시간까지 알려 주었다. 나는 남편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악한 세력을 방어하는 선한 의도들의 연합, 기도의 힘과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다. 당시 신앙생활은 내게 사치일 정도로 정신없을 정도였고 교회는 못 나가고 있었지만, 내 아픈 삶 속에서도 소중한 기회들을 통해 선한 역사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하신 건 모두 엄마의 기도 덕분이었다.

    이런 경험은 아이에게 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트라우마 이면에, 적지만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하나의 경험을 얻었다는 사실은 그나마 그 와중에도 감사한 일이다.

    가족이라고 다 가족은 아닌 것이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채, 사생활이라는 덮개로 가리어진 고통들이 얼마나 많은 지, 그리고 지금처럼 제도적인 사회적 안전망이 어느 정도 구축되지 않았던 시절엔, 이혼이라는 단어의 주홍색 볼드글씨체에 두려움을 느꼈던 시절엔, 꼭 힘없는 무지에서가 아니라 학습된 무기력감에서 비롯된, 포기한 듯한 삶들이 얼마나 많았었는지 우리는 지금이라도 공동체 속의 이웃들의 아픔과 흐느낌, 비명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물론 그때의 엄청난 아픔의 기억들은 아이들의 마음 구석구석에 가시처럼 박혀 있지만, 스스로의 방어기제를 사용해서인지 그냥 주어진 하루하루를 아프면서도 잘 살아내 준 아이들이 참 고맙다. 자랑스럽다.

아직도 그 상처들이 보이지만, 커가고 있고 마음도 성장해 가면서 스스로 상처를 다루고 있음에 감사한다.






  

취소 완료



키워드 선택 3 / 3검색              

                    





아들트라우마과수원학습지교사학습지담임극한입학교사





댓글 쓰기 허용afliean














작가의 이전글 나는 진화하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