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지 않으면 모른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 교수가 수업시간에 흥미로운 테스트를 했다고 한다.
아시아 국적의 학생과 현지 미국인 학생을 불러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것을 잘하는지 등 자신에 대하여 평가를 내리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모니터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살아가는 방식을 비교한 자료가 있었다. 동양의 경우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이 못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서양의 경우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잘하는 일에 더 초점을 맞추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학생의 대답은 자료와 일치했다.
미국인 학생의 경우 자신이 잘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 있게 대답했고 자신이 똑똑한 편이라 답했고 아시아 국적의 학생의 경우 잘하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대답을 했고 머리가 좋은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아시아 국적의 학생은 학점이 미국인 학생보다 훨씬 높았고 심지어 조기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시아 학생의 경우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하는 것에 대해 강조하고 드러내지 않았고 미국 학생의 경우 평균적인 실력이나 자신이 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이것을 드러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
원래의 나의 성향이었으면 내가 잘하는 것을 드러내고 자랑하려고 했겠지만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 인지 오히려 잘하는 것을 감추기 바빴고 진짜 재능이 있는지조차 끊임없이 의심하며 나를 낮추기 바빴다.
이 정도는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직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인가?
완벽해질 때 까지는 말하지 말아야지!
나는 사실 매우 모순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높았고 내가 잘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컸지만 사람의 눈을 잘 의식하고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 잘하는 것에 대한 기준치가 높아서 내가 재능 있고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나를 보여줘야만 했다.
뉴욕의 영상 프로덕션에서 프로그램의 한 과정으로 인턴십을 했었다. 따로 페이는 지급이 되지 않았고 생각보다 많은 현지인들이 무페이로 인턴십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내가 신경쓰였던 것은 돈을 받느냐 안받느냐가 아니라 받지 않은 만큼 내가 인턴십을 하며 돈 대신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보통 회사에서 일을 할 때 일이 없어도 어쨌든 월급 받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에 자신을 '월급 루팡'이라 칭하며 여유를 즐기는 경우가 있다. 나 또한 현재 제작사에서 일하며 가끔 '월급 루팡'이 되면서 일이 없는 것의 소소한 여유와 즐거움을 만끽한 적도 있다.
하지만, 미국 인턴십에서의 여유는 즐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에겐 인턴십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오게 된 목적은 먼저, 정말 이곳에서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기위함이었다.
이 때문에 주 5일 8시간 넘게 일을 하는 회사에서, 심지어는 페이도 지급이 되지 않는데 아무 일 없이 앉아만 있는 것은 목적에 부합하지도 않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내가 배정되었던 회사는 다른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배정된 회사에 비하여 일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미국-한국의 문화교류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에서는 어학연수 후 각자 인터뷰를 봐서 현지 회사에 배정되는데 회사마다 업무의 강도나 일의 종류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참가자의 경우 현지 직원처럼 일을 하며 소정의 급여를 주는 곳도 있었고 또 다른 참가자의 경우 거의 일이 없어 하루 종일 웹 서칭만 하다 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나의 경우 후자였다.그러나 내가 바란 것은 전자의 상황이었다.정말 현지인처럼 일을 하며 내가 할 수 있는지 나를 시험해보고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보여줬다.
내가 잘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자랑했다.
회사에 배정된 후, 슈퍼바이저는 하루에 한 시간이면 다 할 수 있는 SNS 관련 업무만 주었고 거의 나를 방치하다시피 하며 아무런 설명도, 교류도 없었다. 심지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혼자 컴퓨터에 앉아 있다 퇴근할 때도 있었다. 소규모의 회사였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도 없었고 지겹고 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인턴십을 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램 참가자의 경우 각자 에이전시 역할을 해주는 스폰 회사가 존재하는데 만약 인턴 생활에 관한 문의가 있으면 스폰서에게 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나는 일주일 만에 바로 스폰서에게 직접 전화 면담을 요청했다.처음에는 회사의 문제라 생각했고 회사를 변경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여겼기 때문에 회사 변경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회사와의 큰 갈등이 없거나 업무적으로 문제가 없는 경우에는 변경이 어렵다는 답변만 왔고 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나 스스로 찾으라는 조언 아닌 조언만 해줄 뿐이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억울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좋은 사수, 동료를 만나서 정말 말 그대로 일을 하고 여러 경험을 쌓아가는데
나 혼자서만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불만만 터트리기에는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미국 현지 스폰서가 나에게 조언한 것들을 직접 실행해보기로 했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회사도 모른다.
내가 어떤 것에 불만을 가졌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등 직접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물론 건의사항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나 또한 스폰서를 통해 중재 요청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제 해결방법은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의 입장에서는 이력서도 내고 면접도 보고 들어왔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고 잘하는 일을 회사가 알아서 잘 배정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의 입장에서 나는 형식상으로 뽑던 인턴 중 한 명이었고
그동안 다른 인턴들이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 않아 동일하게 업무를 부여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나 자신에 대한 자랑(?)을 하게 되었다.
우선, 내가 조금이라고 알고 있거나 할 수 있는 일을 나열해봤다.
단편영화를 제작하며 얻은 기초적인 편집 능력, 촬영, 음향 장비를 다룬 경험,
실무적으로 해본 적은 없으나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를 다룰 수 있는 자격증 보유,
대학교에서 논문 및 기획서 작성을 하며 얻은 기본적 리서칭, 글쓰기, 문서작성 능력 등등
스스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소소하고 작은 지식과 경험까지,
또한 회사에서 직접 해보고 싶은 업무들에 나의 능력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페이퍼 하나가 꽉 찰 정도로 적고 또 적었다.
월요일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하며 한마디 인사를 한 이후 이어폰을 꼽고 자신만의 세상으로 들어간 슈퍼바이저에게 종이를 전달했고 나의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업무가 부족하다 생각하고 인턴십을 지원한 이유가 현지 영상 회사에서 업무적인 지식을 쌓고 관련 경험을 하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충분한 업무를 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나의 '장기 자랑'을 써놓은 페이퍼를 본 후 서포트할 수 있는 업무가 있으면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별 것 아닌 일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미국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물론, 회사라는 조직 자체에서 일하는 것이 처음이었던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특히, 평소에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는 자신이 없다면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성향이 아닌 내가 직접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나의 능력을 자랑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용기 내서 나의 의사를 전달하고 나의 능력을 드러낸 결과 나는 회사내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