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적이

겨울이야기1

by 홍유

대학 동기들 단톡방에 깜짝 소식이 올라왔다. 얼마 전 과방을 잠시 방문한 동기가 잡동사니 속에서 날적이를 발굴해왔다는 소식이다. 우리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선배님들이 과방에 놓아주셨던 그 날적이! 우리 학번 공용 일기장 날적이가 20여 년의 시간을 살아남아 세상에 나타났다.

날적이를 기억 속에서 펴 보니, 우리가 함께 지났던 시간이 보인다. 엠티 사진을 모두 출력해서 날적이에 붙여놓은 과대표의 정성도 있다. 스무 살이 느끼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비평이 생생하다. 외로움을 토로하는 글 밑에는 ‘파이팅!’이라던지, ‘술 사줄까?’로 대변되는 위로도 남아 있다. 그 시절, 우리는 성인과 청소년의 경계에서 처음 만난 세상을 낯설게 느꼈다. 그렇기에 새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을 함께 나누었다. 같이 고민하고, 서로를 받아주고, 믿고, 마음을 털어놓았다. 서로에게 응답했던 마음들이 몽실몽실하게 엮인 따스함은 몸속 어딘가 남았다. 세상 속 눈밭을 디뎠을 때 꽁꽁 언 발을 녹인 것은 그 따스함이었다.


요즘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칼날이 보인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교묘히 비하하며 웃는다. 말하는 사람이 숨긴 독기는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아무도 지적할 수 없다. 그것은 오롯이 듣는 이가 감당할 몫이다. 항의하면 예민한 사람이라 폄하된다. 싫어도 태연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말로 남을 할퀴며 박장대소를 하고, 다친 사람은 피를 흘리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한다. 다른 사람들은 함께 웃거나, 어색하게 고개를 떨구거나, 그냥 지나간다. 나의 모습은 이 중 어디에 그려질 것인가?


새삼 날적이를 찾아보고 싶다. 몇 줄이라도 남아 있을 나의 흑역사를 마주하는 것은 탐탁지 않다. 그래도 우리가 모두 순수한 어른이었던 그 시절을 찾고 싶다. 서로를 타박하면서도 걱정하던 도닥거림. 서로를 위한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심. 그 안에서 피어나는 향기가 무척이나 그립다.


그것을 위해 몇 잔의 커피를 준비해야 할까. 가져올 친구를 위해 한 잔, 나를 위해 한 잔, 그리고 함께 할, 많은 이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여러 잔. 그렇게 머릿속으로 진한 향기를 느끼며, 글 속에 박제되어 세상에 남아 있는 따스함 속으로 여행할 준비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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