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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Sep 07. 2023

외모는
마이너스 요인으로만 작동한다

육각형 인재상이 자본주의의 괴물이기만 할까? 벤츠 삼각별에 당해보면 안다

종종 얼굴이 탁월한 친구들의 푸념을 듣는다. 얼굴이 탁월한 사람들은 자기 얼굴에 이런 생각을 갖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 '혹시 사람들이 내 외모만 보고 나에게 오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매우 단기적인 만남을 제외하면(그리고 매우 단기적인 만남은 인간관계라고 하기조차 어렵다), 얼굴은 인간관계에서 플러스요인이 아니다. 인간관계란 외모와 외모의 만남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라서, 외모가 아무리 탁월해도 인성이 별로면 결국 지속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다음과 같다. '얼굴은 플러스요인이 될 수 없으며, 오직 마이너스요인만 될 수 있다.' 즉, 외모는 아무리 뛰어나도 인성을 커버해줄 수 없다. 물론 반대로, 외모가 너무 관리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좋은 성격을 지녔어도 접근을 방해한다. 이러한 사실을 확장하면, 인간은 자신의 가장 부족한 측면이 타인에게 주로 평가받는 진정한 면모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누군가의 <가장 낮은 측면의 상태>에 "OK"판정을 내린 평가자가 그의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평가자에게 <다른 측면들의 상태>는 그저 보너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뭔가 결함이 있는데 그걸 다른 역량으로 보충하겠다는 전략은 추천할 만하지 않다. 자동차에 엔진오일이 부족한데 부동액을 두 배로 채우는 것은 '보충'이 아니다. 사람은 좋은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쁜 것이 있어서 관계를 끝낸다. 뭔가 마이너스가 있으면 그 마이너스만을 집중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성격이 안 좋으면 사고방식을 고쳐야 하고, 다른 어떤 게 부족하면 그걸 보완하는 잘 알려진 방식을 실천해야 한다. "결혼상대로는 무난한 사람이 좋다" 같은 말들도 똑같은 원리인 것이다.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단 하나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장기적인 관계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 사람은 다 좋은데 이게 별로야",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정말로 치명적인 단점을 감수하고, 그것 외의 장점 때문에 사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감수할 수 있는 단점을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 별로라는 것이 그에겐 딱히 그렇게까지 심각하지 않고,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사귀는 것이다. 장기적인 인간관계에서 수용가능한 '치명적 단점'이란 없고, 장점이 가려줄 수 있는 단점도 없다. 모든 단점은 오직 '내가 그것에는 기질적으로 관대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상관없어'의 형태로만 수용된다. 


시간의 힘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파괴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존재 각각의 고유한 속성과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에. 누군가의 가장 약한 고리라는 것은 결국 시간이라는 피로도 앞에서 가장 먼저 "사건사고"의 형태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천 개의 사슬이 티타늄이라도 하나의 사슬이 무른 납으로 되어 있다면 그걸 누가 못 보겠는가?


비교와 줄세우기를 과도하게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이 "육각형 인재", "(결혼 상대로) 육각형 여자/남자" 같은 개념을 쓰는 것까지는 존중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인간을 만남의 대상이 아니라 투자의 대상으로 보는 파괴된 영혼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물적인 언어 안에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지면 답 없다"는 나름의 통찰이 들어있다는 것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육각형을 다 채워야 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어느 하나라도 크게 비어있으면 지속가능하지 않기에 육각형을 운운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육각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래프의 가장 낮은 점수 - 즉 "가장 약한 고리" - 가 수용가능할 만큼은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진실이다. 


외모가 훌륭하고 탄탄한 몸매에 자기관리까지 완벽한데 불안정하게 애정을 갈구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 성격이 사려깊고 다정하고 둥글둥글한데 식이조절 · 위생관리 · 중독통제 안 되는 사람, 외모와 자기개발의 정도가 모두 좋은데 하루하루 낮은 자존감과 불안에 떠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보았는가? 지속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친구들을 볼 때면, 차라리 자기가 육각형 인재 되기를 갈망하면서 아득바득 명상하고 아득바득 마음챙김 하고 아득바득 미라클모닝하고 아득바득 보톡스 맞고 아득바득 강연 듣고 아득바득 전문직 준비하는 평가불안 내면화한 K-현대인들이 비교적 나아 보일 때가 있다. 물론 걔들도 걔들 나름의 이슈가 있겠지만.


육각형 인재상이 너무 야박하게 느껴질 때는, <벤츠 삼각별>(◬) 인재 · 그래프의 한 쪽이 푹 파인 <팩 맨>(ᗧ···ᗣ···ᗣ··) 인재도 있다는 걸 - 그리고 언젠가 그들에게 한 번 크게 데여 본 경험을 돌이켜보면 좀 나을 것이다. 인간을 자산으로 여기고 투자하기 위해서 찾는 육각형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찾는 육각형이라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추구일 것이다. 


나는 때로는, 이 육각형의 추구에 그런 생존의 기술을 넘어 "탁월성(arete)"라는 너무나 아름다운 고대 그리스 정신이 깃들어 있음도 느끼곤 한다. 지(知) · 덕(德) · 체(體) 그리고 진(眞) · 선(善) · 미(美) 모두에 완벽을 기하는 자기실현의 극대화, 참으로 가치롭지 않은가? 사람이 한 번 태어나서 자신의 어떤 부분도 포기하지 않고 탁월성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 아니한가?


아무런 성찰 없이 그저 상품화해서 돈으로 바꿔먹으고 해서 문제이지 - 자신을 완벽한 구슬로 다듬는 것이 나쁜 것일 수 없고, 사랑과 결혼을 제 한 몸 편하게 살려는 전략적 투자의 대상으로 봐서 문제이지 - 고대 그리스적 탁월성을 가진 전인(全人)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나쁜 일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레테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솔직히 뭐랑 사랑에 빠질 것인가? 뉴진스?









사진: UnsplashCarlos Felipe Ramírez M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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