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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May 09. 2023

대장항문외과 의사의 눈으로 본 <닥터 차정숙>

크론병과 장루에 대한 오해와 진실

어제는 아내가 즐겨 보는 드라마 <닥터 차정숙> 7화를 보고 마음이 심란해서 잠을 설쳤다. 누가 자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끌만한 자극적인 소재를 잘 끌어다 붙여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칭찬해 주고 싶다.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다만 드라마가 의학적인 내용이 주가 아니다보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무거운 주제를 스토리 전개를 위한 양념으로 가볍게 소비해 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온갖 고민들이 한꺼번에 담긴 에피소드였는데, 드라마는 이에 대한 친절한 설명 없이 주인공들 사이를 엮어가는 데에만 집중하다 보니 시청자들은 대체 저 환자는 왜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루가 뭔지도 모르는 시청자들에게 '크론병 = 유전병 = 불치병 -> 자살시도'라는 그릇된 인식이 남을까 우려스럽다.


크론병, 내가 제일 잘 안다. 크론병을 앓고 있으면서 크론병을 치료하고 대학에서 크론병에 대해서 가르치는 대장항문외과 의사인 내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정답부터 얘기하자면 크론병은 불치병도 아니고 유전병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겪고 있고 내가 치료하고 공부하고 있는 병이니까, 내 말이 맞다.





https://tv.naver.com/v/35662990

<닥터 차정숙> 7화 중에서


"선생님도 저 같은 병에 안 걸려 보셨잖아요? 나는 내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결혼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지 자식을 낳아도 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런 확신이 없어요."


극중에서 크론병 환자가 내뱉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을 후벼 판다. 가벼운 마음으로 드라마를 보다가 갑작스러운 크론병 환자의 등장에 벙쪘을 크론병 환우와 가족들도 모두 마찬가지 마음이었을 것이다. 큰 문제 없이 대학병원 외과의사 노릇을 십수 년째 하고 있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 온 아내조차도 '당신은 정말 괜찮은거지? 장루 만들 일은 없는 거지?'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어볼 정도이니 다른 환우들이야 오죽했을까. 극중 환자의 장인장모는 크론병이 유전병이라며 환자를 몰아세우고 견디다 못한 환자는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하게 되니 이 에피소드를 본 크론병 환우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다. (댓글창은 이미 크론병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지 말라는 환우들의 외침으로 가득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작가가 크론병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제대로 자문도 받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하는 크론병 환우와 가족들의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약으로 잘 조절되고 있는 대부분의 크론병 환자에게는 크론병은 충분히 치료 가능한 병으로 인식되어 있겠지만, 약으로 조절이 잘 안 되는 일부 환자는 반복적으로 수술을 받고 평생 장루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크론병의 이러한 무서운 이면은 실제 크론병을 앓고 있는 환우와 가족들조차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만나는 '수술이 필요한' 크론병 환자들의 상당수는 약으로 조절이 잘 되지 않는 환자들이고, 나는 내가 가진 병이 극단적으로 나빠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하며 살고 있다.


https://brunch.co.kr/@lsy99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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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lsy9983/55


아무런 확신이 없는 극중 환자와, 크론병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한 나는, 누가 더 두려울까.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분명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 크론병의 발생에 유전적인 소인이 연관이 있을 수는 있으나 (이것은 세상 모든 질환이 마찬가지가 아닐까?) 크론병이 유전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크론병은 비록 난치병이긴 하나 약으로 충분히 조절할 수 있고 일상생활이 가능한 병이다. 


대학병원 대장항문외과 의사로 꿋꿋하게 살고 있는 나 스스로가 그 증거다. 





<닥터 차정숙>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이 의사인 로맨틱 코미디일 뿐이다. <슬기로운 의사생활>과는 결이 다르다. 극중 환자가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음을 설득하려면 환자의 감정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만큼의 시간을 할애하여 환자의 두려움과 절망을 충분히 보여주고 이해시켰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하트만 복원수술을 하면서 대장 길이가 짧다는 둥 splenic flexure는 이미 다 쳐서 더 이상 여유가 없다는 둥 대장항문외과 의사가 아니면 절대 공감할 수 없는 대사 하나하나와, 어렵게 연결해서 air-leak test까지 했는데 leakage가 확인되어 어쩔 수 없이 diversion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정으로 미루어 볼 때 전문의의 자문을 받아 에피소드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자세한 설명은 없고 쓸데없이 디테일한' 설정들은 수술 중 오십견 악화라는 웃음을 주는 또다른 설정에 완벽하게 묻혀버린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는 자신의 병을 감당하지 못하고 헌신적인 아내를 뒤로한 채 세상을 등지려하는 무책임한 크론병 환자만이 남았다.


극중 환자가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하게 된 것은 본인을 지지해 주지 못하는 처가 가족들도 물론 이유가 되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크론병이라는 난치병과 함께 평생 '장루'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큰 이유를 차지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장루가 뭔지 아는 일반인이 얼마나 있겠나. 엄정화가 극중 크론병 환자의 배에 붙이고 있는 저것이 사실은 똥을 받아 내는 똥주머니라는 사실을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어떻게 알겠느냐는 말이다. 평생 배에 똥주머니를 차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상이나 해 보았는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결혼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지 자식을 낳아도 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환자의 모습이 조금은 더 이해가 되시는지?


장루를 가지고도 물론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허나 이삼십대 젊은 나이에 영구적으로 장루를 가지게 된 환자들의 절망감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비록 드라마에서는 그것마저도 주인공들의 로맨스를 위한 소재로 소비해 버리기는 했지만)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한 극중 장루 환우를 보며 복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https://brunch.co.kr/@lsy9983/34


오해를 막기 위해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면, 모든 장루가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 상당수의 장루는 복원이 가능하며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하는 장루는 오히려 드물다. 극중 크론병 환자의 장루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비록 장루복원술을 했음에도 또다른 장루를 가지게 되었지만 몇 달 후에는 충분히 복원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극중 환자의 말처럼 '제자리'가 아니라, '한 걸음 전진'이었다. 이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였다면 환자와 보호자가 조금은 더 희망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찌질하기 짝이 없는 차정숙의 남편은 왜 하필이면 대장항문외과 교수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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