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맞아?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내가 가려던 길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기로.

by 꽉형 헤어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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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호기롭게 시작했던 첫 학기. 물론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많은 일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들 하죠. 제 유학 생활도 어쩌면 시간이 해결해 준 여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의 커리큘럼에 익숙해졌고, 클래스메이트들과의 대화도 점점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던 독일어 실력도 조금씩 나아졌고, 교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고, 책도 점점 더 잘 읽히기 시작했죠. 물론 그 모든 변화엔 노력이 함께했지만, 저는 ‘시간의 힘’을 믿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석사 과정은 보통 4학기(2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학기에 30학점(LP)을 꾸준히 채운다면, 3학기 동안 90LP를 이수하고, 마지막 학기에는 30LP에 해당하는 졸업논문(Masterarbeit)을 쓰며 졸업하게 됩니다. 물론 독일 학생들에게도 4학기 만에 졸업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들 합니다. 저에게는 더욱 그랬습니다. 4학기 졸업은 꿈처럼 느껴졌고, 결국 저는 7학기 만에 졸업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마지막 관문, 졸업논문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케바케’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대학마다 커리큘럼과 운영 방식이 제각각입니다. 제가 다녔던 하노버의 라이프니츠 대학교(Leibniz Universität Hannover)에서는 졸업을 위해 총 120LP가 필요했고, 그중 30LP가 졸업논문, 그리고 그보다 앞서 12LP에 해당하는 ‘학생논문(Studienarbeit)’이 필수였습니다. 이 학생논문은 졸업논문을 위한 준비 단계로, 비교적 가볍게 하나의 주제를 정해 연구하는 작업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 학생논문의 주제를 심화·구체화하여 졸업논문으로 발전시키게 되죠.

건축매니지먼트를 전공하던 저에게는 당연히 논문 주제도 이 분야에서 골라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BIM 기술, 자동화(Automatisierung), 공정관리 프로그램 등 여러 주제가 있었고, 저는 공정관리와 관련된 구체적인 프로그램 도입 혹은 실질적 실행 방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련 분야를 연구하는 ICoM이라는 인스티튜트에 접촉을 시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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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머피의 법칙은 늘 예상치 못한 시점에 찾아옵니다. 학생논문 주제를 정해야 할 시점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ICoM의 단 한 명뿐인 교수님이 RWTH Aachen, 아헨 공대로 이직하게 되었던 겁니다. 제가 졸업한 Leibniz Uni도 TU 9의 소속으로 나름 알아주는 대학이었지만, 독일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공대인 아헨대였기에 더 나은 조건을 제안받은 교수님께 이직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해당 교수님이 떠나자 교수진의 절반도 함께 옮겨가면서 인력 공백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새 교수님이 부임했지만, 기존 인스티튜트의 박사과정생과 연구원들은 새 시스템을 정비하고 수업을 준비하느라 바빴습니다. 저는 이미 모든 수업을 수료한 상태였기에 커리큘럼상의 문제는 없었지만, 논문 작성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대기자 명단(Warteliste)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학생논문 주제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방향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건축매니지먼트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재료학, 특히 목재나 콘크리트 관련 실험 논문을 쓰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모두 자리가 찬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거의 포기 직전의 상황에서 겨우 받아들여진 곳이 바로 IWES (Institut für Windenergiesysteme), 즉 풍력 에너지 시스템 연구소였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에서도, 독일에서도 풍력에너지는 제 관심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들은 수업이라곤 기초적인 Windenergie 한 과목과 데이터 분석 수업이 전부였죠. 말 그대로 전공도, 관심도, 배경지식도 부족한 상황에서 저는 논문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 학기를 허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가려던 길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기로 말이죠.

학생논문 주제는 “전 세계 풍력단지의 현황 및 발전 분석”이었습니다. 데이터는 유럽 최대의 응용과학 연구기관인 Fraunhofer에서 제공받았고, 이를 분석해 통계치를 만들고 파이썬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이 포함되었습니다. 저는 파이썬도, 풍력도 생소했지만, 이왕 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거절당하더라도 상처받지 않는 편이라, 주저 없이 질문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기계공학을 전공하던 후배 한 명이 파이썬에 능숙했고, 그의 도움을 받아 분석 작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저는 학생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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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건 졸업논문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학기가 지난 후에도 ICoM 인스티튜트의 대기명단은 줄어들지 않았고, 다음 학기에도 자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말 그대로 ‘멘붕’이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야 정말 하고자 했던 ‘건축매니지먼트 졸업논문’을 쓸 수 없다니요.

이때 저는 두 갈래 길 앞에 섰습니다. 하나는, 원했던 인스티튜트에서 논문 자리가 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는 것, 다른 하나는, 익숙하지는 않지만 한 번 논문을 써봤던 풍력 인스티튜트에서 졸업논문까지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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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 것 같나요?

저는 결국 두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제가 계획했던 길은 아니지만, 지금 제가 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을 택한 것이죠. 그렇게 저는 풍력에너지 분야에서 졸업논문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논문 작성을 넘어, 돌이켜보면 인생은 항상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독일에 나온 이후 어학 공부를 하면서도,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도 언제나 계획과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계획이 틀어졌을 때 ‘얼마나 빨리 포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유연하게 방향을 틀 수 있느냐일지도 모릅니다. 그 선택이 언제나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 멈추지 않고 발을 내디뎠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길도 분명 존재합니다.

‘내가 원하던 길’이 아니어도, ‘지금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했던 그 순간들이 결국 저를 졸업이라는 목적지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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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가 아니더라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제가 독일 유학에서 배운 가장 큰 지혜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그 지혜를 믿고 앞으로의 삶을 유연하게 걸어가려 합니다. 계획대로가 아니더라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은 제가 독일 유학에서 배운 가장 큰 지혜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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