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고향에서 쫓겨나 흩어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크게 보면 두 번에 걸쳐 일어났다. BC 586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에게 멸망한 뒤 바빌론 유배를 떠날 때가 첫 번째이고, 로마 치하에서 일으킨 세 차례의 반란이 모두 진압되고 AD 132년 영구 추방당한 때가 두 번째이다. 유서 깊은 솔로몬 왕 성전이 신바빌로니아 느브갓네살 2세에 의해 파괴되고, 이후 새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까지도 로마 황제 티투스에 의해 파괴되는 민족적 아픔을 겪었다.
세계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떠돌이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생력이 강했다. 신앙생활에 충실하면서도 경제활동에는 남다른 재능을 보여 부의 축적에도 능했다. 현지인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민족 집단으로서의 사회적 영향력은 점점 더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과 서유럽 등 기독교 사회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시각은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이단’이요 ‘예수를 죽인 민족’이었다. 로마 시대부터 쌓여온 뿌리 깊은 편견이다. 유대인 자신들의 배타적 신앙 행태와 지나친 선민의식의 영향도 컸다. 더욱이 하느님의 선택은 구약성경 때까지는 유대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후 기독교로 옮겨왔다는 주장도 점점 힘을 얻어갔다.
▲ 시오니즘의 태동
중세 십자군 전쟁 동안 무슬림과 함께 유대인 대학살이 수없이 자행되었고, 이후에도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박해와 사회적 탄압은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15세기말 스페인 이사벨 여왕이 집행한 유대인 영구 추방 조치가 대표적 사례였고, 이후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마르틴 루터의 말년 변신은 근대 서유럽 사회에 반유대주의 분위기를 고착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각지의 유대인들은 로마가톨릭보다 탄압이 덜했던 러시아와 동유럽 일대의 동방정교회 지역으로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런 혐오와 배척 분위기 속에서 유랑인 또는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 마음속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염원이 대를 이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일종의 DNA 같은 귀소본능이었다. 로마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지명까지 바꿔버린 이스라엘 왕국의 땅, 옛 선조들이 살았던 가나안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염원은 19세기 후반에 태동한 시오니즘과 함께 조금씩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19세기말 서구와 동구에서 연이어 일어난 2개의 사건이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 하나는 작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로 서구사회에 큰 이슈가 된 드레퓌스 사건이고, 또 하나는 포그롬(Pogrom)이란 명칭으로 러시아와 동구사회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과 집단 약탈 연쇄 사건이었다. 전자는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반유대주의를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후자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찾아 어디론가 시급히 이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낳았다. 유대인 사회에선 당시 신세계로 소문난 미국 땅으로의 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동시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옛 유대의 땅을 되찾자는 시오니즘 운동도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 영국이 뿌린 갈등의 씨앗
이런 와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4년 뒤 독일과 오스만 제국 등 동맹국 패전으로 전쟁은 끝이 난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오래 통치해 왔던 팔레스타인 지역도 승전국 영국에게 점령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변화에 막연한 희망을 갖게 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꿈에 그리던 선조들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전쟁을 치르면서 영국은 적국 오스만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놓고, 3개의 서로 모순되는 협정을 맺은 바 있었다. 영국이 승전국이 되는 걸 전제로 3자 각각에게 미리 약속해 주는 일종의 이면 계약이었다.
첫째는 종전 후 오스만 제국령을 프랑스와 영국이 분할 통치한다는 양국 협정, 둘째는 로스차일드 등 유대계 금융권이 전쟁 자금을 지원해 준다면 차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도록 도와주겠다는 밸푸어 선언이었는데 문제는 아랍 민족과 맺은 셋째 협약이었다. 오스만 제국에 속하는 아랍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연합국을 도운다면 차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중동 지역에 아랍민족의 독립국가를 세우게 해 주겠다는 이 세 번째 협약은 종전 후 철저히 무시되고 지켜지지 않았다. 같은 땅을 놓고 유대인과 아랍인 양측에 동시에 해준 영국의 이런 모순된 약속이 훗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 유대인 이주와 건국
영국에게 배신당한 아랍은 종전 후 다시 이어지는 서구의 식민 체제에 반발해 아랍 민족주의 저항운동을 펼쳤고,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은 막무가내로 이주해 몰려와선 팔레스타인 지역을 비집고 들어갔다. 7세기 초 이슬람 제국의 깃발로 이 땅에 들어와 대를 이어 살아온 아랍 무슬림들로선 자기들 땅이라 우기며 밀고 들어오는 유대인들이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 600만 명이 학살되는 홀로코스트를 거친 유대인들로서도 자신들을 보호해 줄 반듯한 국가와 새 삶터가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미국과 서방세계로 이주했던 유대인들은 현대 자본주의 시대로 넘어오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국제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족집단으로 급성장해 있었다. 이런 그들은 1948년 마침내, 1300년 가까이 이슬람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 이스라엘을 건국한다. 오늘날까지 75년간 멈추지 않는 비극적 싸움이 막 시작되는 순간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