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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May 04. 2024

산티아고는 늘 그 자리에 있다


“너,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계급이 존재하는 곳이 어딘지 알아? 비행기 안이야. 퍼스트, 비즈니스, 이코노미, 그 사이엔 달랑 커튼 하나인데 아무도 그걸 못 넘어. “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혜정은 스튜어디스다. 폼나는 직업에 예쁜 외모에, 외형상 그녀는 남부러울 게 하나 없다. 문제는 금수저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늘 열등감에 빠져 산다는 것이다. 상전 같은 친구 연진(임지연 배우) 등에 빌붙어 가난한 친구 동은(송혜교 배우)에게 학폭을 가하는 그녀의 모습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이의 전형이다. 


부자 친구들이 자신을 천대하고 하인처럼 대하지만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만으로 연대감과 위안을 얻는다. 열등감 덩어리인 그녀에게는 궁극의 꿈이 있다. 돈 많은 금수저 남자와 결혼하여 신분 상승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해서 친구들이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작년 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차수정 배우가 연기한 최혜정의 삶은 황폐하고 비극적이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내 위치를 확인하며 괴로워하거나 이를 악무는 모습은 드라마에선 이렇듯 극단적이지만 현실에서도 흔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네 대부분이 숨기듯 품고 있는 약한 모습이기도 하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내적 기준에 따른 자존감을 찾아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현자들은 말한다. 머리로는 수긍이 되지만 평범한 이들이 쉽게 이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닌 듯하다.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의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만남이나 모임을 사회생활 전가의 보도로 여기던 시절, 월간 일정표에 빈칸이 있으면 추가 약속으로 채워 넣어야 안심이 되고, 스케줄 없이 한가한 날이면 세상에 뒤쳐지거나 소외되는 건 아닌지 불안했던 시절이다. 휴먼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며 차곡차곡 쌓아가던 타인의 명함들이 당시로선 애지중지 보물처럼 느껴졌으나 이제 와 돌아보니 나를 남들과 비교하는 매체일 뿐이었다.


넘사벽인 상대방 앞에서 스스로 초라하고 비굴해지거나 친한 벗의 승진 소식에 조급해지고 우울했던 기억들이 씁쓸하게 남아있다. 그때의 내 마음이 좀 더 여유롭고 넉넉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타인의 위치를 통해 나의 상대적 좌표를 비교하며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우월감에 도취했으니 돌이켜보면 유치하고 안쓰러운 내 모습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날들의 추억도 새록새록하다. 프랑스 국경 생장 마을을 출발한 지 10일째 되는 날, 일주일 동안 정들었던 일행과 헤어졌다. 오른쪽 발목에 통증이 심해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일단 나 혼자 멈춰서 쉬어야 했다. 일행 넷은 이런저런 선물과 격려의 말들을 남겨주곤 다시 길을 떠났다. 9일 동안 쉬지 않고 250km를 걸어온 나로선 그들보다 연식이 훨씬 많은 만큼 쉼표가 필요했다.


내가 멈춘 스페인 북부의 시골마을 아헤스(Ages)는 아름답고 아늑했다. 마을 어귀 산 라파엘 호스텔에서의 2박 3일은 꿀 같은 휴식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엔 불편한 어둠이 자리를 잡아서 나의 완벽한 힐링을 방해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이들에게 뒤처지고 있다는 조바심 그리고 어서 일어나 앞서간 일행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급증이었다.


숙소의 침대 위치가 그런 불편한 심경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오전에 발목 물리치료를 받은 후 오후 내내 2층 방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열린 창밖으로 순례자들이 도란도란 예기 나누며 지나는 모습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남기는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까지도 우울해지려는 내 마음을 더 부추겼다.



저녁 식사는 숙소 아주머니가 방으로 가져오겠다고 하는 걸 마다하고 1층 식당으로 내려가 먹었다. 포르투갈에서 온 미하엘과 한 테이블이라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점심 먹을 때 인사를 나눈 사이인지라 서로 편했다. 나보다 여섯 살 아래인 그는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이 아름다운 아헤스 마을을 그냥 지나버리기 아까워서 하루 눌러앉은 거라 하였다. 언제까지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목표 같은 건 없고, 순례길 위에서의 하루하루 여정 그 자체를 최대한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뒤처진다고 조바심 내거나 앞서간 이들을 따라잡으려 조급해하는 내 모습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여행을 무슨 달리기 경주처럼 바삐 하는 내 자신이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였다. 다음 날 아침 미하엘이 떠나며 남겨준 말도 가슴에 와닿았다.


“Mr. Lee, Don’t worry. Santiago will be there!”


산티아고는 어디 안 가고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니 염려 말고 푹 쉬었다 오라는 말이다. 그날 역시 발목 안정을 위해 종일 침대에 누워 지냈지만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하루였다. 여유롭고 느긋한 마음으로, 그야말로 온전히 휴식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

 


타인과의 경쟁의식과 상향식 비교가 우리를 덜 행복하게 만든다. 위와 앞만 바라보며 허겁지겁 뒤쫓다 보면 스스로 초라해지기 십상이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고 좌우 양쪽까지 살펴볼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좌표를 명확히 알 수 있고, 자신의 외로운 내면과도 만날 수 있다. 산티아고는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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