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이야기
섬나라 영국은 우리 한반도와 지형적으로 닮았다. 남쪽은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 북쪽은 켈트족의 스코틀랜드, 기질과 성향이 다른 두 민족은 오랜 세월 갈등과 마찰을 빚었다. 섬 전체가 영국이라는 단일 국가로 통합된 배경에는 400년 전 숙명의 라이벌 두 여인의 드라마틱한 삶과 죽음이 녹아 있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두 주인공이다.
엘리자베스는 헨리 8세의 둘째 딸이다. 어머니 앤은 왕자를 기대했던 왕에게 미움받아 참수됐다. 자신의 탄생 자체가 비극이었지만 그녀는 이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기필코 살아남았고, 천신만고 끝에 잉글랜드 여왕에 즉위하였다.
반면 메리 스튜어트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여왕에 즉위한다. 어머니의 친정인 프랑스에서 유럽 최고의 왕실 교육을 받았고 프랑스 왕비까지 되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복귀하였다.
두 여왕은 탄생과 성장 과정은 물론 기질과 성향까지도 극단적으로 달랐다. 고모와 조카 사이인 둘은 차기 잉글랜드 왕의 후계 구도를 놓고 평생 동안 라이벌로 맞섰지만 결국은 고모 엘리자베스가 조카 메리에게 참수형을 내리는 비운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영국은 역사적으로 대단한 발전을 이룬다. 숙명의 라이벌 두 여인의 어긋난 삶이, 변방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뻗어 나가게 만든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년)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힌다. 69세에 영면할 땐 ‘다 익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듯’ 평온했다고 한다. 천수를 누린 셈이다. 재위 기간도 45년이나 된다. 반면 메리 스튜어트(1542~1587년)의 최후는 비참했다. 5촌 고모인 엘리자베스 여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모반죄에 얽혀 처형되었다. 사형 집행인의 미숙으로 세 번의 도끼질 후에야 목이 잘렸다. 엘리자베스의 모친 앤 불린의 최후 역시 비참했다. 왕비의 시녀였다가 헨리 8세의 눈에 들어 두 번째 왕비가 되었으나, 3년 만에 죽임을 당했기에 훗날 ‘천일의 앤’으로 불렸다.
헨리 8세는 첫 아내 캐서린이 딸을 낳자 이혼해 내쫓았고, 두 번째 아내 앤 불린마저 딸 엘리자베스를 낳자 간통 혐의를 씌워 참수해 버렸다. 그리곤 겨우 11일 만에 왕은 세 번째 여인 제인 시모어와 결혼식을 올렸고, 드디어 학수고대했던 첫아들 에드워드를 얻는다. 엘리자베스는 이렇듯 원치 않는 자식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비정한 아버지 헨리 8세가 죽으면 왕위 후계 서열은 3위였다. 1, 2위인 이복 남동생과 이복 언니 다음인 것이다. 그렇다고 왕위가 3위까지 이어질 일이 있으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공주라기보다는 사형당한 죄인의 딸에 불과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어린 몸으로 과연 성인이 될 때까지 목숨이나 제대로 부지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네 번째 부인도 내쫓고, 다섯째 부인까지 참수해 죽인 후 여섯 번째 왕비를 들일 즈음 엘리자베스는 어느덧 외로운 10세 소녀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북쪽의 스코틀랜드 왕국에선 모두의 염려 속에 또 한 명의 공주가 태어났으니 그녀가 바로 메리 스튜어트다.
헨리 8세 친누나의 손녀였으니 아홉 살 위인 엘리자베스와는 5 촌간이다. 메리는 태어나고 6일 후 부왕 제임스 5세가 사망하면서 자동적으로 스코틀랜드 여왕의 자리에 즉위한다. 앞서 오빠 둘이 있었으나 모두 병으로 일찍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시 잉글랜드는 웨일스와 아일랜드를 통합하고 마지막으로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헨리 8세로선 왕이 죽고 갓난아기가 여왕인 스코틀랜드가 너무도 만만한 상대였다. 해서, 소모적 전쟁보다는 간편한 방법을 택한다. 한 살 메리 여왕을 다섯 살 아들 에드워드와 혼인시켜 며느리로 데려오면 스코틀랜드를 통합해 다스리기에 최고의 방법이었다.
약소국 스코틀랜드로선 강대국의 강압적 혼인 요청에 노심초사했지만 그렇다고 선뜻 응할 수는 없었다. 가톨릭 국가인 스코틀랜드기 개신교의 나라 잉글랜드에 통합될 경우 종교적 탄압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특히 메리의 모친인 기즈 왕비는 가톨릭 강국인 프랑스 왕실의 귀족 출신이었고, 더욱이 여러 아내를 처형하는 등 잔악무도한 헨리 8세에게 딸 메리를 며느리로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기즈 왕비의 거부에 분노한 헨리 8세는 훗날 ‘난폭한 구애(The Rough Wooing)’로 불리는 전쟁을 일으켜 메리 여왕을 납치해오려 했지만 이는 실패하고, 스코틀랜드만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를 계기로 기즈 왕비는 메리를 친정인 프랑스 왕실로 피난시켜 양육을 부탁했고, 자신은 스코틀랜드에 남아 왕실을 지킨다. 조국은 파탄 나고 있었지만 여섯 살 메리 여왕은 화려한 파리에서 선진 교육을 받으며 기품 있게 성장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즈음 15세 소녀로 성장한 런던의 엘리자베스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부친 헨리 8세가 병으로 죽은 후 이복동생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녀는 여전히 의지할 곳 없이 미래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