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를 떠나 프랑스 왕실에서 화려한 생활을 시작할 무렵 잉글랜드의 15세 소녀 엘리자베스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을까? 아버지 헨리 8세가 죽자 이복동생 에드워드가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했지만 재위 6년 만에 병사하고 만다. 아버지의 매독균이 유전되어 어릴 적부터 병약했기 때문이다. 16세 왕이 죽기 직전 왕실은 차기 후계를 고심했다. 왕의 이복 누나인 메리 1세(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 여왕과는 다른 인물)가 후계 1순위였지만 열렬한 가톨릭 신자라 개신교 군주로선 안 맞다고 보았다. 2순위인 엘리자베스는 간통죄로 사형당한 죄인의 딸이라 역시 안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직계는 아니지만 왕실 일원인 18세 제인 그레이를 추대해 억지로 왕위에 앉혔다. 당연히 자신이 후계자라고 믿고 있던 30세 후반의 메리 1세가 가만있지 않았다. 가톨릭 세력을 모아 들고일어났고 일거에 새 왕권을 거머쥐고 만다. 원치 않는 왕위에 얼떨결에 앉았던 18세 제인 그레이는 9일 만에 폐위되고 앞서의 여러 여인들처럼 형장에서 목이 잘려나가는 비운을 맞는다.
메리 1세로 새 왕좌에 오른 메리 튜더는 이혼당하고 한 맺힌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명예회복이 중요했다. 그녀는 즉위하자마자 부친 헨리 8세의 개신교 대신 모친 캐서린의 구교 가톨릭을 부활시키는 데 역점을 둔다. 이 과정에서 개종을 거부하는 수많은 신교도들을 화형 등 학살하였기에 후세 사람들은 그녀를 ‘피의 여왕, 블러디 메리(Bloody Mary)’로 부른다.
앞서의 제인 그레이도 신교도였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준다 했지만 본인이 거부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메리 1세 여왕에겐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역시 어머니 원수의 딸이었다. 게다가 신교도였다. 시골로 피신해 병석에 누워 있던 엘리자베스는 언니 메리 1세가 보낸 병력에 체포되어 런던타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4개월 동안 갇혀 떨던 엘리자베스는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척하며 겨우 런던타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더욱이 차기 왕위 후계 1순위이기도 한 이복동생을 메리 1세 여왕인들 쉽게 죽일 순 없었다.
이렇듯 서슬 퍼렇던 피의 여왕도 재위 5년 만에 42세 나이로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원인은 어긋난 여러 주변 정세로 인한 우울증과 암 등 복합적이었다. 왕위를 이어 줄 자식을 간절히 원했지만 끝내 얻지 못했기에 유일한 직계 혈족인 엘리자베스에게 왕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잔혹한 아버지와 비운의 어머니, 그리고 단명한 이복동생과 블러디 매리 언니의 통치를 겪으며 숨죽여 살아온 엘리자베스는 이렇듯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고 26세 나이에 드디어 잉글랜드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한편 프랑스 왕실에서 10년 넘게 양육받아 온 메리 스튜어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파리의 화려한 궁중 문화를 배우며 성장한 덕택에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유럽 최고의 신붓감으로 소문나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가톨릭 국가인 스코틀랜드의 여왕이다. 그녀와 혼인한다면 스코틀랜드의 군주 자리까지도 넘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유럽은 스페인과 프랑스 등 거의 전역이 가톨릭이었지만, 헨리 8세가 오래전 잉글랜드를 개신교로 바꿔 놓고 주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로 파급시키는 바람에 신교와 구교 간 세력 확장 싸움이 곳곳에서 일고 있었다. 더구나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거치며 앙숙 간이었기에 스코틀랜드와 혼인을 통해 우호를 맺는다는 건 세력 확장에 대단히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 헨리 8세가 메리를 며느리 삼으려고 ‘난폭한 구애’ 전쟁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죽은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다.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이런 메리의 가치를 간파했기에 오래전부터 그녀의 성장 과정을 후원해 왔고, 드디어 1558년 4월 어린 메리를 며느리로 삼는다. 아들 프랑수아 2세와 혼인시켜 왕세자비로 맞아들인 것이다. 이제 앙리 2세는 며느리 메리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라고까지 대외적으로 떠들고 다녔다. 현재의 여왕 엘리자베스는 시녀의 딸이자 사생아라서 왕실 적통이 아니고, 헨리 8세 누나 마가렛 튜더의 손녀인 메리가 잉글랜드의 가장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떠드는 것이다.
사실 이런 논리는 앙리 2세의 주장만이 아니었다.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 주요 가톨릭 세력을 중심으로 파다하게 퍼져가는 논리라서 갓 즉위한 엘리자베스에게 메리는 몹시도 신경 쓰이는 라이벌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메리의 결혼 이듬해 앙리 2세가 마상 시합 중 사고로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아들 프랑수아 2세가 프랑스 왕좌에 오른다. 이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는 잉글랜드의 잠재적 왕위 계승자로 자타가 공인하면서 프랑스 왕비의 자리까지 꿰찼다. 그야말로 당대 유럽 최고의 인물로 부상한 셈이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로선 라이벌 메리의 승승장구가 내심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메리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거기까지였다. 바로 이듬해 남편 프랑수아 2세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메리의 운명은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시아버지 앙리 2세에 이어 남편까지 연이어 사망했으니 프랑스 왕실에서 메리는 고립무원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그동안 메리를 눈엣가시로 여겨온 여인이 엘리자베스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시어머니이자 죽은 아들을 이어 실질 권력자가 된 카트린이었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