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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May 11. 2024

에덴의 동쪽 사람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말년의 살리에리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e)은 자기보다 뛰어난 주변 인물에 대해 극심한 질투와 열등감을 느끼는 심리를 말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비엔나 왕실의 궁정 음악가 살리에리는 작곡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감탄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든다.  


왜 내가 아니고 그인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내가 아니고, 젊지만 오만하고 천박한 그에게 왜 신은 천재적 자질을 부여한 것인가? 


막연한 분노와 광적인 질투 끝에 살리에리는 병으로 쇠약해진 모차르트를 은밀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영화 말미에는 먼 훗날 그로 인한 죄의식에 젖어 살다가 결국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려다 실패한 살리에리를 비춘다. 정신병동 휠체어에 앉은 채 볼품없이 늙어버린 미치광이 모습이다.  


‘나는 보통 사람들의 대변자. 세상의 모든 평범한 이들이여, 너의 죄를 사하노라.’ 

그가 읊조리던 마지막 대사는 누군가를 질투하며 스스로 힘들어했던 세상 모든 이들의 마음에 위안을 준다.  


영화 '에덴의 동쪽'... 아버지의 사랑에 목마른 제임스 딘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영화화한 고전 명작 ‘에덴의 동쪽’에서 캘리포니아 농장주 아담은 두 아들 중 모범생인 장남 아론만을 아끼면서, 거칠고 불량끼 있는 둘째 칼에겐 사랑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은연중 미워한다. 오래전 집을 나간 아내의 피가 둘째에게 많이 흐른다는 선입견 탓도 있었다.  


자신이 어렵게 벌어들인 거금을 아버지 생일 선물로 바치면서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던 칼의 애절한 눈빛, 그리고 자신의 그런 정성이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을 때의 칼의 처연한 표정은 배우 제임스 딘의 명연기와 함께 많은 올드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는 형 아론에 대한 질투가 결국은 형과 아버지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영화에선 이어지지 않지만 그런 이후의 칼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 모차르트의 죽음 이후 죄의식과 회한 속에 묶여 살다 속절없이 늙어버린 노년의 살리에리 모습과 오버랩된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건 끔찍해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죠. 못되고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만들죠.’ 

영화 엔딩 부분의 이 대사가 세상의 ‘선택받지 못한’ 모든 이들의 아픔을 대변한다. 


토마스 콜 1828년 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소설과 영화로 일반에 많이 알려진 ‘에덴의 동쪽’은 구약성서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영화 속 세 인물, 아담과 두 아들 칼과 아론은 구약 창세기의 아담과 두 아들 카인과 아벨에 해당한다. 형과 동생의 위치만 바뀌었다. 원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의 동쪽 인근에 살림을 차려 세상살이를 시작했고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 


피터 폴 루벤스 1600년대 作 '동생 아벨을 죽이는 카인' The Courtauld Gallery


장남 카인은 땅을 일구는 농부가 되었고, 둘째 아벨은 양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 하느님에게 첫제사를 드릴 때 각자의 제물을 정성껏 준비했다. 카인은 땅에서 경작한 곡식과 과일을, 아벨은 기름진 가축의 새끼를 각각 제물로 올렸지만 어쩐 일인지 여호와 하느님은 아벨의 가축 제물만 반기며 취하고, 카인이 올린 제물은 반기지를 않았다. 분노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한 카인은 며칠 후 들로 나가자며 동생 아벨을 꾀어낸 후 돌로 쳐 죽였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길이길이 쓰게 된 것이다.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 1845-1924)  <카인>


오래전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둘러볼 때 생소한 그림 한 점 앞에서 한동안 넋을 놓았던 적이 있다. 프랑스 화가 페르낭 코르몽의 1880년 작품 ‘카인(Cain)’,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가로 7m의 대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창세기 4장 16절의 ‘카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Nod) 땅에 살았다’는 한 문장과 연결되는 작품이었다. 


질투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이 에덴의 동쪽 멀리로 정처 없이 떠도는 극적인 풍경을 담았다. 언젠가 내릴지 모를 신으로부터의 천벌을 두려워하며 온 가족이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이다. 



그림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카인의 모습은 죄책감과 두려움에 찌든 듯 초췌하고 비참해 보인다. 들것에 앉아 두 아이를 보듬고 있는 그의 아내도 삶의 희망을 잃은 눈빛이다. 그림 속 구석기 원시인들 어느 누구의 모습에서도 밝은 빛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의 고단함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모두에게 드리워져 있다. 


원래가 땅을 일구는 농부였던 카인이다. 그러나 그가 맞닥트린 대지는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황량하고 삭막한 광야일 뿐이다. 죄인 카인의 이후 삶이 어떨지를 그림은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또한 카인의 후예가 될 미래 인류의 역사에도 불길한 전조를 암시하는 듯하다.  


우리 인간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욕망과 질투의 감정으로 인해 스스로 괴로워하거나 타락하거나 혹은 죄를 범하기도 한다. 금단의 열매를 향한 이브의 욕망이 낙원을 잃게 했고, 아벨에 대한 카인의 질투가 태초의 살인을 불러왔다.  


욕망은 절대적이고 질투는 상대적이다. 두 감정 모두 어둠에 가깝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밝음을 지향하는 이성의 능력도 심어 놓았다. 창세기의 여러 불길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이후 역사를 통해 감정보다는 이성의 영역을 더 심화 발전시켜 왔다.  


인류의 미래 역시 밝을 것이다. 이성을 바탕으로 한 우리 각자의 지혜가 집단지성으로 슬기롭게 모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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