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중동 여러 국가들 중 면적 크기만으로 대국(大國) 4개를 꼽는다면 이집트,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정도일 것이다. 인류 4대 문명 발상지 중 두 곳이 이집트, 이라크였고, 그리스 침공으로 서방세계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나라가 이란이었다. 인류 역사 교과서의 초반 페이지부터 찬란한 내용을 남기는 이들 3개국과 달리 사우디아라비아는 너무도 조용했다. 선사시대와 고대사 부분에 관한 한 별다른 내용을 남기지 않는다. 농사도 안 되고 수렵도 어려운 황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살거나, 낙타 끌고 다니며 장사해 하루하루 먹고살았을 고대 아랍인들의 척박했을 삶이 쉬이 연상된다.
▲ 마호메트의 등장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고대 로마로 이어지는 대제국의 정복 지도에도 아라비아 반도는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 그만큼 변방 오지요, 불모의 땅이었기에 정복자들이 구태여 욕심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별 볼 일 없이 드넓기만 한 사막의 서쪽 귀퉁이에서 한 인물이 태어난다. 창세기 아브라함 계보로부터 모세와 예수에 이어지는 최후의 메시아였다. 마호메트라고도 불리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40대 초반이 되면서 세상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는 AD 610년 알라신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이슬람을 창시하고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면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랍 민족이 이슬람을 앞세워 바깥세상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시기와도 겹친다. AD 632년 무함마드가 죽고 2년 후 이슬람 왕국의 2대 칼리프가 된 우마르 1세는 북쪽으로 시리아와 예루살렘 등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공해 들어간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숨죽여 살아왔던 변방 아랍 민족이 최초로 대외 정복 전쟁에 나선 것이다.
▲ 유대인과 무슬림의 첫 조우
결국 동로마군을 소아시아 북방으로 밀어낸 우마르 1세는 여세를 몰아 동방의 사산왕조 페르시아까지도 멸망시킨다. 비잔틴과 페르시아, 두 제국은 지난 오랜동안 영토 전쟁을 치르며 전력을 소진해 왔기에 신생 이슬람 왕국의 공격에 쉽게 밀려나거나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AD 638년 이슬람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에 입성해 기독교 도시를 접수했다. 유대인들이 신생 이슬람 세력을 반기며 곳곳에서 호응한 것도 동로마군이 방어를 포기하고 쉽게 퇴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 새롭게 예루살렘의 주인이 된 이슬람 칼리프 우마르 1세는 로마제국의 500년 전 디아스포라 정책을 폐기하고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방문과 거주를 허용해 준다. 오늘날 철천지원수가 된 관계와 달리 유대인과 무슬림의 첫 조우는 이렇듯 상호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반세기 세월이 지나며 두 종교 간 갈등은 점차 표면화되어 간다.
▲ 이슬람 대제국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는 살아생전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하룻밤 꿈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그곳 성전산(Temple Mount)에서 하늘에 올라 알라신을 만나고 왔다고 전해진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천상여행 전설이 깃든 성전산에 AD 691년 바위사원을 짓고 이후 알 아크사 사원까지 건설하며 확고한 이슬람 성지를 구축한다. 이곳은 창세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유대교의 성지이기도 했기에 한 지역을 놓고 두 종교 간 갈등은 첨예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다. 최근 20여 년간 더 격심해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영토 분쟁도 외형적으로는 성전산 알 아크사 사원을 배경으로 한 종교적 도발과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서방에서는 사라센이라고 불렸던 아랍 민족은 이렇듯 동로마제국을 고향 땅 서방으로 몰아내고 동방의 페르시아까지도 완전 정복하면서 자신들의 신흥 종교 이슬람을 전역에 전파시킨다. 그 결과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포함하는 지중해 남쪽과 아나톨리아 반도를 제외한 지중해 동쪽 전역이 이슬람 대제국 휘하로 흡수되기에 이른다.
▲ 십자군 전쟁의 서막
이후 이슬람은 유럽대륙 이베리아 반도까지 그 세력을 넓히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분열과 이합집산이 진행된다. 여러 왕국들 중 튀르크족의 셀주크 왕조가 페르시아 전역을 통일하곤 비잔틴 제국의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점령하는 신흥 제국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그런 과정에서 AD 1077년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아랍 이슬람이 비잔틴 제국군을 몰아낸 지 440년 만이다. 이전까지는 다소간 차별은 있어도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종교 활동은 어느 정도 허용이 되었다. 그러나 셀주크 제국이 예루살렘의 새 주인으로 들어오면서 상황은 살벌해진다. 유대인 활동과 동로마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가 억압받는 등 예루살렘은 급속히 이슬람만의 성지로 탈바꿈되어 가는 것이다. 이는 서방 기독교 사회의 공분을 샀고, 예루살렘 성지 회복에 대한 여론이 조성되었다.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는 AD 1095년, 동로마 제국 황제의 지원 요청에 응하는 형태로 원정 연합군을 결성한다. 성지 회복이 명분이지만 예루살렘을 피로 물들일 제1차 십자군, 인류 최초의 기독교와 이슬람 간 종교 전쟁 서막이 오른 것이다.
⑧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