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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잔 Sep 05. 2021

나는 깨어나고 있다

나에 대한 깊은 신뢰

그들이 우리를 데려온 그것이 아니야. 우리가 우리를 데려온 거지.

                                                                                                          -영화 인터스텔라 중-         



  상처 받은 영혼이 자주 하는 말들이 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나는 남들에 비해 머리가 좋지 않아.' , '되는 일마다 잘 되는 일이 없어.', '운은 항상 나를 비껴가고 있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등 자기 패배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 내면에는 '나는 고통스럽고, 그러한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 '는 욕구도 크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썼다고 말하지만 소용없었다며,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그것이라는 환상을 가진다. 다양한 자기 계발서를 탐독하지만, 변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현실 세상에서 패배감이 물들어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상담현장에서 자주 접한다. 변화에 대한 동기가 있는 듯싶지만, 정작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마주하기로 하기보다는 피하는 방법에만 몰입된 사람들. 중독자들이 그렇고, 범죄경력이 많은 사람이 특히 그렇다.      


  고통을 다루는 상담에서는 내면의 깨어남과 변화 동기를 강조한다. 의식의 전환, 건강한 자아가 자신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생각한다. 상담자는 그 내면의 긍정적이고 건강한 자아와 연합하여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털어놓기와 건강한 변화 모습에 대한 지지이다. 그 밑바탕에는 신뢰의 회복을 중시한다. 사실 상담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신뢰감을 다시 키워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나에 대한 신뢰, 타인에 대한 신뢰, 세상과 미래에 대한 신뢰이다.      


  신뢰란 경험이다. 좋은 경험을 자주 접할수록, 그 경험을 통한 자신의 사람됨을 다시 회복하고, 역경에 대해 극복할 힘을 키워내는 것이다. 내면에 신뢰가 있는 사람은 현재 당면할 문제를 해소할 가능성이 좀 빠르고, 이러한 신뢰가 부족하거나 붕괴한 사람은 이를 회복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상처가 클수록 다시 신뢰감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삶의 고통을 듣는 나는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와 반응에서 '네가 나를 알아? 나를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자신의 상처가 고통스럽고, 그동안 자신의 상처를 돌봐 준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실 상담자도 그 고통을 이해하기가 힘들 때가 많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맞다. 나에게 공감이라는 말보다는 그 고통의 경험과 함께 있어 주기가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고통을 함께해 주지는 않았지만, 현재는 고통을 느끼는 사람과 있어 주고, 그 고통받은 사람이 자신이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들어봐 주는 것, 그것이 전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고통의 해소는 어떠한 특별한 기법이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그것이 상담해나갈수록 믿게 된다.      


  상처에 대해 깊이 이야기할수록, 한 개인의 상처를 얼마나 숨기고 있으며, 그 상처를 통해 많이 아파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고통을 피하거나 직면하는 방식이 개인이 삶이라는 것을 안다. 거기에는 고통이라 여겨지는 것- 그것에 대한 개인만의 독특한 해석- 반응이 있다. 그 개인만의 독특한 해석을 더 자세히 들으면 들을수록 한 개인이 변화된다.     


  그 개인의 해석을 듣기 위해 나는 두 격언을 마음에 품는다. 하피즈의 격언에서 배운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을 듣는 것처럼'과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지금-여기서 나에게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라는 말이다. 이렇게 한다면 나의 주관적인 판단과 충고와 조언해 주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지고, 그 사람과 나만이 존재하는 듯싶다. 그래서일까? 왠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공간이 사라진 듯 보이고, 그 사람의 고통이 생생히 느껴진다. 공명하는 공감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가 즐겁고, 가장 자신 다우며, 삶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말한다는 것은 개인 차원을 넘어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알게 해 준다. 얼마나 자신이 편협했는지, 무엇을 실수하고 있는지, 무엇을 깨닫고 있는지, 어떤 것을 하면 더 두려워하는지?     


  나는 내 문제가 해소되지 못하고 무언가 얹힌 것처럼 답답해질 때, 상담자를 찾는다. 내 동료들이 상담전문가들이라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고민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바빠서 대충 듣는 사람, 온전히 내 이야기를 경청하지 못하는 사람, 나의 입장보다는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과 결단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그럴 테니까!      


  그런데, 의외로 내가 해소되지 못하지는 못했던 고민을 해소하는 순간들이 있다. 문제와 상황이 달라져서 변화가 왔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믿는 것은 기대하지 않은 무언가의 힘이다. 우연이라 할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을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길을 지나다 발밑에 걸린 전단의 문구, 화장실에 앉아 있다 보게 되는 격언들, 평소 나와 친하지 않았던 사람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다주는 경험, 아이와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힌트들, 창밖의 따사로운 햇살, 우연히 접하게 되는 책 속의 문구들. 유튜브에서 듣는 스님의 법문 등 수없이 많다.     


  이전에는 나의 문제에 사로잡혀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걸렸다면, 이제는 삶이 나에게 변화를 위한 메시지를 준다고 믿으니, 고통에 빠지는 기간이 좀 줄어들었다. 완전한 해소는 없지만, 그런대로 버틸 수 있고, 그 과정이 끝나면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힘이 조금은 생긴 듯싶다.      


  점점 더 삶에 대해 알 수 없는 힘을 인식할 때, 나는 조금 더 나답다고 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진다. 인터스텔라 영화처럼 다른 차원의 나, 신,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현재의 나 자신을 깨어나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중일 것이라 믿고 있다. 

     


“위대한 발견은 어떠한 명백한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대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며 그대를, 그대의 얼굴을 응시하고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 마이클 폴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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