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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 도황리 Sep 11. 2022

걷는 대화

다락인증센터에서 협재해수욕장까지

[협재해수욕장, 오일파스텔. 2021]

자전거도로만 걷다 보니 지겨웠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샛길로 빠졌다. 원래 걸음수보다 좀 더 걸어야 했지만, 후회는 안 했다. 여행이란 것이 적당한 일탈이 있어야 더 흥미롭고 재밌으니까.

제주의 마을길을 걷다 보니 특이한 가옥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단층 구조의 집들은 지붕이 담장보다 낮거나, 거의 같았다.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다가, 자꾸 보게 되니까 궁금해졌다.


" 딸냄, 저 집들 보이지. 왜 지붕이랑, 담장 높이가 같게 지었을까?"

" 어디, 진짜네. 근데 저러면 천장이 낮아서 불편하겠다."

" 그러게. 엄마 생각엔 제주엔 세 가지가 많다고 했잖아. 거기서 힌트가 있지 않을까?"

" 돌, 바람, 여자지만... 시대가 변했으니 지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은 거... 바람? 니 생각은 어때?"

" 아직 제주 바람을 겪어보지 않았어 잘은 모르겠지만 그 이유라면 이해가 됨~"


몸이 힘들지 않았을 땐, 가볍게 제주의 모습을 보이는 대로 서로의 생각을 얘기도 하고,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토론도 하고,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 몸이 지치면 각자의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키거나, 오직 걷기만 했다.


자전거도로는 아무래도 큰 도로를 끼고 있을 때가 많아서, 편의점 앞을 지나갈 때가 많았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편의점이 두 곳이 있었다. 첫 번째 편의점은 편의점 입구에 돌하르방이 문지기처럼 서있었던 곳이고, 두 번째 편의점은 야외 탁자가 놓인 곳에 어른 주먹 두 개를 합한 것 같은 노란 하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곳이다. 그 두 곳의 편의점주는 보지 못했어도, 보지 않아도 제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느껴졌다. 체인점인 편의점에,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건 그 사람만의 색이고,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림도 그렇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그려도, 그리는 사람에 따라 그림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만의 표현방식이 다르고, 감각이 다르기 때문. 나 역시 그림을 그리면서 나만의 표현, 감각을 갖고 싶지만, 정말 마음처럼 되지 않아 지금도 노력 중이다.

마을길을 걷다 보니 성질 급한 유채꽃들이 노랗게 무리 지어 핀 곳도 있었다. 구멍 숭숭한 밭 담장이 거센 바람 앞에서 단단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지켜내고 있는 것처럼, 나의 노력들이 모이고, 쌓여서 언젠가 나 역시 내 자리를 지킬 수 있기를...


아직 2차 목적지인 협재해수욕장은 나오지 않았다. 애월 곽지해수욕장은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끝도 안 보이는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나와 딸은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오랜 침묵의 시간이 지나서 협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11월에 왔을 때 보았던 그 아름다운 에메랄드 물빛은 여전했다. 모래사장엔 하얀 모래가 바람에 소실되는 걸 막기 위한 덮개가 씌어있었다. 그 덮개 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혹시나 힘이 풀린 다리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협재 해수욕장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 마저도 사람들은 모두 바닷가에 있었다. 우리는 바다가 잘 보이는 벤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앉을 힘조차 없어서, 배낭을 베개 삼아 베고 누웠다. 누워서 듣는 파도소리가 집에서 잠이 안 올 때마다 들었던 파도소리 asmr 같았다.

잠들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었지만, 잘 수 없었다. 우리는 아직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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