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탔을 때 그녀는 안전바를 잡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 주변뿐 아니라 그 칸엔 빈자리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서서 만화책을 읽었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진한 푸른색 바지에 검은색 바탕에 하얀 땡땡이 티셔츠 그리고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때문에 그녀의 하얀 얼굴이 도드라져 보였고, 서양인치고 왜소했다.
처음엔 그냥 책인 줄 알았다. 간혹 지하철에서도 책을 읽는 외국인을 봤으니까.
그 책은 만화책이었다. 아주 진지하게 읽고 있어 책 제목이 궁금했지만
끝내 알지 못했고, 그녀는 신촌에서 내렸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이틀 뒤였다. 여전히 그녀는 빈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고, 서서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서 있는 곳 바로 앞 빈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진지하게 읽고 있는 만화책 제목이 궁금해서.
그렇다고 대놓고 쳐다볼 수는 없어서 힐긋 보았다. 만화책보다 그녀의 에코백에 달려 있는 키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색 모자를 쓴 오리 키링은 그녀의 모습과 상반되게 익살스럽게 생긴 인형이다.
두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제나 지금이나 단정했다.
만화책 제목은 '학원앨리스' 내용은 모르지만, 제목만으로도 대략 순정만화라는 걸 알 수 있다.
순정만화 주인공 옆에 있는 착한 친구처럼 생긴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만화책을 읽는 것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순정만화가 좋아서 읽는 걸까? 궁금했지만, 영어울렁증이 있는 나는 묻지 못했다.
그러다 불현듯 외국어 공부를 할 때 그 나라 언어로 적힌 만화책을 읽으면 재밌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교환학생일까? 유학생일까? 아니면, 교환학생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한국이 너무 좋아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에 온 사람일까?
제대로 아는 거라곤 그녀의 가방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지하철에서 읽을 만화책이 있다 것뿐이다.
그녀는 신촌에서 내렸고. 지하철은 다음 역을 향해 달려가고.
나는 가방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