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태풍 산산으로 잔뜩 흐렸지만, 그날은 비가 쏟아졌다. 마치 하늘에서 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것처럼.
그 빗속을 뚫고 지하철을 탔다.
운이 따르면 합정과 당산 사이를 지나갈 때 여의도 풍경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앉는다.
남들 출근하는 시간을 조금 피해서 출근해도 못 앉을 때가 있다. 그래도 거의 앉는 편이다. 다만 풍경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앉느냐? 못 앉느냐의 차이일 뿐.
자리에 앉으면 먼저 사람들을 관찰한다.
만화책 읽는 그녀를 만난 날부터 생긴 습관이다.
그날은 맞은편 대각선에 앉아 자고 있는 그를 보게 되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손으론 안전바를 잡은 그.
박제한 것처럼 한 번의 미동도 흐트러짐도 없었다. 합정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과 대조적으로 하얀 얼굴이었다.
2호선을 타고 석 달 넘게 출퇴근하며 알게 된 것은 사람들이 신촌보다 홍대에서 더 많이 내리고,
신도림에선 많이 내리고, 많이 탔다. 안내방송과 동시에 그는 잡고 있던 안전바에서 손을 놓았다. 일어설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는 자세를 살짝 비틀더니 안전바에 어깨를 기대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 역은 합정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지하철이 합정역에 정차하자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내리지 않고 미처 보지 못했던 바닥에 놓였든 우산 손잡이를 잡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잘은 모르지만 그의 어제는 우산에 기댈 정도로 힘들었나 보다.
우산은 주인의 검은 티셔츠와 같은 색이었다. 그 우산이 주인의 온몸을 떠받쳤다. 주인의 몸을 받아내던 우산은 오래 서있지 못했다. 그가 잠결에 우산을 놓쳐버려서. 조용한 지하철 안에 바닥으로 '탁'쓰러지는 우산 소리는 제법 컸다. 그 소리에 깰 법도 한데 그는 계속 자고. 옆에 앉은 중년 남자가 자기 발밑으로 넘어진 우산을 조심스럽게 그 앞에 밀어놓았다.
"이번 역은 영등포 구청입니다. 내리..."
그가 꿈틀 하더니 벌떡 일어섰다. 비몽사몽일 텐데 잊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우산을 챙겨 들고서.
밖으로 나가면 우산은 이번엔 비로부터 주인을 지켜 줄 것이다.
내리고 타는 사람들 속에서 그가 앉은자리에 누가 앉을까 궁금했다.
영등포 구청에서 탄 긴 생머리가 어울리는 그녀가 주저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검은 티셔츠와 손에 들린 우산이 마치 짠 것처럼 방금 내린 그의 우산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