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지속하기로 결심했던 순간부터 매일 꾸준하게 했다면, 지금 그 일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악기 연습, 그림을 그리는 일, 코딩 공부, 사람들에게 자주 연락하기, 영어공부’ 이러한 일들은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해왔다면,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을 현실에서 꾸준히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일상이 바빠서 일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하려는 일에 대한 열정과 관심은 생각보다 쉽게 식기 때문이다.
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자신이 읽은 책 중에 최악의 책이 있다고 했다. 내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 책은 ‘그릿’이라고 답했다. 그릿은 펜실베니아 대학의 심리학자 앤젤라 더크워스(Angela Duckworth)의 연구를 담은 책과 강연이 사람들 사이에서 알려지면서 유명해진 책이다. 국내에서 한동안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내용이다. 높은 학업 성취,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니 를 보인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성취가 돋보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지능이나 재능보다 성취를 더 많이 설명할 수 있었던 변인은 그릿이라는 것이다. 그릿은 우리말로 간단하게 번역하면, ‘끈기’와 같은 것이다.
그릿이 최악이었다고 말했던 사람은 “끈기가 중요한 거 누가 모르냐, 근데 난 지금 너무 힘들고, 노력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 것 같고, 좋은 부모를 만난 친구들은 너무 쉽게 기회를 얻는다.”라고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도 충분히 공감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노력에 대한 결실’은 너무 허탈한 결과를 만드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이런 시대에 존버(X 나게 버틴다)는 너무 잔인한 메시지와 같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 친구가 이해한 '그릿'은 나의 이해와는 조금 달랐다. 그릿은 단순히 존버를 실천하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그릿은(Grit)은 성장(Growth), 회복력(Resilience),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 끈기(Tenacity)의 앞 철자를 딴 용어로 보다 구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릿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장기간의 목표 앞에 실패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그릿은 자신의 삶을 대하는 전략적인 자세와 같다.
그릿은 "넌 끈기가 부족해, 좀만 더 견디면 달라질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걸 얻으려면 끈기를 가져"라는 꼰대 냄새가 나는 메시지가 아니다. "삶은 타고난 지능이나 재능이 내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냐, 삶을 대하는 태도를 좀 바꾸면, 네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와 같은 메시지다.
그럼 우리는 현실에서 어떻게 그릿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
먼저 자기 신념이 담긴 우선순위를 갖고 일상을 살아야 한다. 성과를 내는 이들은 분명한 우선순위를 갖고 살아간다. 우선순위에 따라 자신의 시간을 디자인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시킨다. 우선순위가 낮은 일에 자신이 매여있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이런 우선순위가 쉽게 바뀐다. 일정 기간은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처럼 여기다가도 그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거나 불안함을 느끼면,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우선순위가 쉽게 흔들린다는 증거는 상황이나 타인의 말에 쉽게 흔들린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에 누군가 던진 한마디가 내 안에 있는 가치체계를 송두리째 흔들고 마는 것이다.
특정한 목표에 오랜 시간 집중하려면, 자기 신념이 담긴 우선순위에 따라 할 일을 배열하고, 그 일에 집중하는 연습, 타인의 말이나 상황에 흔들리는 진동의 진폭을 줄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타인이나 상황이 내 삶의 주도권을 빼앗아갈 때 자신의 권리를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필요하다.
둘째, 충동을 조절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목표로 한 일을 지속하는 가운데 우리 내면엔 늘 충동이 존재한다. 이러한 충동은 평생을 따라간다. 본능이기에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건 이러한 충동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의 문제다. 목표로 한 일 앞에 자고 싶고, 유튜브 보고 싶고, 누워서 끝없이 인스타그램 스크롤을 내리고 싶은 충동, 보다 만 넷플릭스 영상을 이어서 보고 싶은 충동, 이러한 충동은 누구에게나 늘 존재한다. 어떤 일을 꾸준히 하려면 그 일이 습관이 돼야 하고, 일상의 루틴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데, 충동에 자리를 한 두 번 내어주면, 습관의 연결고리는 약해지고 루틴은 힘을 잃는다.
충동을 조절하려면, 충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습관을 바꿔야 한다. 충동에 반응하지 않고 충동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 충동은 소란스럽게 마음을 휘젓고 다니다가 제풀에 지쳐 조용해진다. 이렇게 조용해질 때 주도권을 찾고 내가 하려던 일에 집중하려는 시도를 반복해야 한다. 충동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순간이 많아지면, 습관과 루틴의 힘이 살아나고 이러한 힘은 충동의 공격을 안정적으로 막아준다.
그릿을 기르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체계를 가진 목표를 갖고, 그 목표에 집중하는 일'이다. 이는 앤젤라 덕스워스의 논문에서 다룬 내용이다. 그릿을 소유한 사람들의 목표는 아래와 같은 형태를 띤다.
출처: Angela Duckworth and James J. Gross(2014). Self-Control and Grit: Related but Separable Determinants of Success. Curr Dir Psychol Sci, 23(5), 319–325.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목표가 있다. 이러한 목표는 매우 추상적이다. 사람마다 의미 있다고 느끼는 일도 다르다. 의미 있는 삶을 이루는 일에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일정 수준의 돈이 필요할 수도 있고, 특정한 직업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는 특정 분야에 종사하며, 전문성을 발휘해서 자신의 일을 통해 사회에 큰 영향을 발휘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위 목표가 필요하다. 그 목표는 좀 더 구체적인 형태를 띠며, 그 수도 많아진다. 그리고 그 하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일상에서 해야 하는 실천과제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단일한 목표를 두고,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시킨다. 하지만 목표가 하이어라키(hierarchy)를 갖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내가 어떤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선순위와 가치가 쉽게 바뀌는 문제다. 때로는 할 일의 우선순위와 가치 판단을 감각이나 느낌에 맡긴다. 어떤 목표를 추구하다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면,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이 괴롭게 느껴지고, 좀 더 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일을 선택한다.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그 일 외에 다른 일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진 것처럼 여겨진다.
위계와 체계를 갖춘 목표가 있으면, 지금 하는 일이 내 내면의 좀 더 깊은 곳에 연결된다. 지금 하려는 일이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를 더 깊이 이해한다. 노력의 양을 늘리거나 전략을 바꾸는 시도를 할만한 가치를 인식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도 방법을 바꿔 지속적으로 도전한다. 하위 목표를 바꿔야 할 때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다른 길을 통해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상위 목표를 향해 하위 목표를 수정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위계를 갖춘 목표는 내면과 할 일을 긴밀하게 연결함으로 그릿을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준다.
내 생각에 아무런 대책도 없는 존버는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견디고 버티는 태도에는 방향이 필요하다. 견고한 전략이 요구된다. 어떤 일을 성취하는 일에 끈기는 중요하다.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존버 하기보다는, 일상에서 그릿을 길러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