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유조이 Sep 22. 2023

물건은 버리고 생각은 채웁니다.

'나중에 필요할지도 몰라' 하는 의구심을 덜어냅니다.

                         

  저는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신혼 때는 드라마 세트장 같은 집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침실, 서재, 드레스룸 등 모든 방에는 기능에 맞는 물건들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서랍장을 열면 마치 쇼핑몰 선반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습니다. 선글라스, 액세서리, 잡동사니까지 종류별로 줄을 지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어서 필요할 때 바로 찾아 쓰는 것을 정리의 규칙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시계 건전지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수납장을 뒤져야 했습니다. 있던 물건을 버리지 않은 채 새 물건을 사들인 결과입니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물건은 늘어나니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서재에는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이 쌓이고, 드레스룸에는 자리만 차지하는 옷들이 가득했으며, 팬트리에는 오래된 커피 머신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서랍을 열면 말라붙은 풀과 한 줌의 오래된 볼펜들이 칸칸이 정리되어 있었고, 이들은 이미 소비기한이 지난 음식처럼 그 쓸모가 다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정리를 잘하는 것이 더 많은 물건을 지니고 살기 위해 익힌 솜씨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읽고 싶을지도 몰라, 나중에 입고 싶을지도 몰라, 나중에 필요할지도 몰라' 하는  미련과 욕심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쌓여가는 물건들은 저의 공간뿐 아니라 마음까지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버리고 비워내기를 시작할 시기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먼저 서재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을 분류하고, 소설, 인문학, 에세이, 여행서, 자기 계발서, 실용서 등 테마 별로 정리했습니다. 새 책이라도 읽지 않을 책들은 과감히 분리수거 상자에 담았고,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되었어도 좋아하는 책은 남겨 두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활자로 된 것은 무엇이든 일단 읽었습니다.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을 통해 시야가 확장되는 경험은 책 읽기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약해지는 시력도 보호해야 하고 무엇보다 타인의 생각을 내가 알아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습니다. 이렇게 버리고 나니 단출하지만 나만의 취향이 담긴 서재가 남았습니다.   

  

  다음은 주방 정리였습니다. 엄마가 사주신 뚝배기, 선물로 받은 컵 등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추억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버렸습니다. 모든 추억을 다 끌어안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추억과도 이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추억만 간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드레스룸은 제가 가장 정리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던 공간입니다. 매일 출근 때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는 것이 즐거울 정도로 옷을 좋아하다 보니 계절 따라 유행 따라 백화점 세일 따라 사들인 옷들이 가득합니다. 옷걸이를 가득 채운 옷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생각했습니다.     

  '이 옷은 정말 좋아하는 옷인가?'

  ' 이 옷은 편안하고 기분 좋게 입을 수 있는 옷인가?'

  ' 이 옷은 앞으로도 입고 싶은 옷인가?'     

  좋아하는 옷인지 편안한 옷인지, 아껴가며 입고 싶은 옷인지 기준으로 옷을 정리했습니다. 과거의 추억이나 가격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나에게 필요하고 행복을 주는 옷만 남겼습니다.  

   

  서재든 드레스룸이든 버리고 비워내기를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나중에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기능을 가진 물건들이기에 살다 보면 한 번쯤 필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없으면 없는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불편함을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추려내고 버리는 손이 과감해집니다.       


   과거의 짐과 불필요한 물건들을 추려내면 제 집착도 추려냅니다. 다방면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 추억은 다 소중한 것이라는 고정관념, 항상 멋있어 보이고 싶은 욕심을 물건과 같이 버렸습니다. 그렇게 버리고 비워낸 공간은 단순히 물건이 사라진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비워둔 자리에는 여유가 생겨나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립니다. 정리의 과정은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정말 필요한 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수시로 불필요한 물건들을 추려내며 살아갑니다. 버리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과거의 추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비워냅니다. 그리고 덜어낸 자리에 차오르는 여유 속에서 나만의 새로운 가치를 채워갑니다.

이전 13화 TV를 끄는 효과적인 방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