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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Aug 01. 2022

동안의 조건

앞집 할아버지는 최강 동안


우리 앞집에는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1년 전 이사하는 날, 문이 열린 우리 집으로 와서 좋은 이웃이 되자고 먼저 인사를 청하셨다. 명함도 주시면서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말씀해 주셨다. 지금 혼자 살고 계시며, 할머니는 아파서 요양원에 계신다고 했다. 근처에 딸이 살고 있어서 자주 왕래한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나와 대화를 하는 동안 막힘이 없었고, 건강해 보였다. 나이는 여쭤보지 않았지만 칠순 중반쯤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는 할아버지는 우리 아이들이 인사를 잘해서 기분이 좋다는 말을 해 주시기도 하고, 내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궁금해하셨다. 나도 경계 없이 할아버지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이야기해 드렸다. 자주 만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아주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만나게 될 뿐이라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많지는 않다. 잠깐 만날 때 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의 할아버지였다.


며칠 전, 또 엘리베이터 앞에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할아버지는 나에게 나이를 물었다.

 “마흔다섯이에요. 할아버지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나, 올해 아흔 하나.”

 나는 ‘아흔 하나’라는 할아버지의 나이에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4,50대 중년의 동안과는 차원이 다른 동안이었다.

 

내 주변에 아흔이 넘어 걸어 다니는 노인은 아무도 없다. 병원에 누워 있는 노인도 없다. 친척들도 여든을 전 후로 몇 년은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나도 어렴풋이 80 전후에 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었다. 친구의 할머니가 아흔이 넘었는데, 건강하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할머니 중에는 아흔 넘어서 자유롭게 거동하며 건강한 노인을 '건너 건너' 보거나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흔이 넘은 할아버지가 청력과 이해력, 거동에 아무런 문제 없이, 그것도 혼자 생활을 해 나가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정말요? 아흔 하나라고요?”

 “허허, 우리 막내딸이 올해 쉰다섯이야.”

할아버지는 익숙한 반응이라는 듯 웃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할아버지는 운동하러 가신다고 했다. 바깥의 기온이 30도가 넘는 날이었는데, 산책을 하신다고 했다.

 “더운데, 조심해서 운동하셔야 해요.”

 “저기 숲길로 가면 안 더워.”

 아파트 근처 산책길은 나무가 우거져 있어 그늘이 많지만, 덥기는 덥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아파트 입구 현관을 나서자 할아버지는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그늘 진 산책로로 들어가셨다. 저 걸음걸이가 90대라니, 나는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칠순 중반의 친정아버지보다 걸음이 더 빨랐다.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더 동안이었다.      


노인의 동안은 걸음걸이, 대화에서 결정된다. 할아버지를 보고 분명하게 느꼈다. 아무리 얼굴이 팽팽해도 걷는 자세와 속도는 나이를 속일 수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나이를 속였다. 무려 20년 이상이나.  


노인과 대화를 하면 ‘주고받는’ 것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이해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청력에 문제가 있어서 큰 소리로 단어를 나열하듯 해야 하는 경우 서로가 답답하다. 그보다 더 답답한 건 잘 들리지만, 일방적인 자기 생각을 주입하고자 하는 노인과의 대화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자신이 가진 고민과 자랑은 쉼 없이 늘어놓는 노인이 많다. 사실 생물학적 노인이 되기 전에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이미 정신적으로 노화 한 사람이다.     

 

노년이 길어졌다.

길어도 너무 길어졌다. 환갑잔치는 당연히 패스고 칠순 잔치도 떠벌리는 건 부끄러운 시대다. 앞집 할아버지처럼 아흔 하나의 나이에 혼자 밥을 차려 먹고, 혼자 잠을 자고, 약을 챙겨 먹으면서도 초라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내린 결론은 운동과 대화다. 매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해야 한다. 할아버지는 잠깐 스치는 사람에게도 먼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다. 사람과 어울려 사는 게 아주 익숙한 모습이다. 사람이 주변에 남아 있게 하려면 배려와 인성을 가져야 한다. 노인이라고 대접받을 생각부터 하고 가만 앉아있으면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혼자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를 아흔을 생각하니 아득해지지만,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다. 살아온 만큼만 더 살면 아흔이다. 지금 주름살 한 두 개 늘어난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혼자 걸을 수 있는 것이 팽팽한 피부보다 백배는 중요하다.


나도 아흔의 나이에 두 발로 빨리 횡단보도를 건너 산책을 다니고 싶다. 지나가는 사람과 말을 섞고, 가끔은 자식들이 나를 봐주러 오면 좋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집 할아버지는 성공한 인생이다. 아흔에 건강하게 걸어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것, 그것보다 성공한 인생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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