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by 혜랑

운명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초인간적인 힘’으로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을 뜻하는 ‘숙명’과는 다르다. 정해진 것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힘은 전혀 다른 것인데도, 운명을 종종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생각하게 되는 건, 드라마나 영화, 책에서 본 강렬한 이미지 때문일 지도 모른다. 운명 같은 사랑, 운명적인 사건처럼 말이다.


사실 운명이란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도 어려운 일들을 맞닥뜨린 경험이 있고, 그런 경험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모두에게 일어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아직 검증되지 않은 것도 많고, 반복해서 일어나곤 해서, 이 세상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존재하고 있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운명은 나에게 신비하고 알고 싶은 그 무엇이다. 꿈을 통해 내 무의식을 탐구하고 이해하고 싶고, 타로카드 속에 숨겨진 인생의 비밀도 궁금하다. 과학책을 보며 이 세계의 놀라운 탄생과 죽음의 법칙도 알고 싶고, 철학책을 보며 사유의 과정이 어떻게 문학과 예술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알고 싶다.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운명 앞에 주저앉아 펑펑 울거나 화내거나 두려움에 떠는 나약한 존재라서 맞설 힘 같은 건 없지만, 신을 믿고 신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물론 이런 궁금증을 풀어내기엔 내 의지와 사고능력이 형편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어쩌면 운명 때문에 신화와 종교, 문학과 예술, 철학과 과학이 발전해온 것은 아닐까? 아니 운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열심히 살았던 것은 아닐까? 운명에 맞서 싸우는 영웅과 신과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운명을 이해하고 싶은 당연한 욕구는 아니었을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운명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의지야말로 수많은 사람을 구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온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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