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차로 버스정류장은 퇴근시간이면 가로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로 북적인다.
줄지어 들어오는 버스들 중에 자신이 기다리는 버스가 있는지 살피는 사람들과, 내리고 타는 사람들로 번잡스럽다.
피해자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전광판의 글씨를 보고 줄지어 들어오는 버스들을 살피며 서있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밤의 날씨는 쌀쌀했고 피해자는 두툼한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버스를 살피던 피해자와 한 버스에서 막 하차한 남자의 눈이 마주쳤고, 피해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남자가 묘하게 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시선을 피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피해자의 앞을 지나가던 때에 피해자는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그 남자가 만지고 지나간 것을 알았다.
1초? 2초? 아주 찰나였지만 분명했다. 착각할 수도 없는 느낌이었다.
피해자는 그 남자를 큰 소리로 불렀고 술에 취한 남자는 활짝 웃으면서 ‘아 미안합니다’라고 손을 흔들었다. 피해자는 그 자리에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오기까지 약 5분. 중앙차로 버스정류장에는 도로 양쪽으로 향하는 횡단보도가 있었다. 남자가 도망칠까 봐 피해자는 남자의 옷자락을 간신히 손가락 두 개로 꼬집고 있었다.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무서웠으니까.
경찰이 도착하고 남자는 그 자리에서 순순히 체포되었고, 피의자가 되었다.
피해자와 피의자는 출동한 파출소로 향했다. 둘은 가벽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었고, 피해자는 고소장을 자필로 작성해야 했다. 왜 써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쓰라니까 썼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서 경찰에게 물어봤더니 그냥 육하원칙대로 일어난 일을 쓰라고 하였다.
술에서 깨고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한 피의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아는 사람한테 자기가 경찰에 억울하게 잡혀왔다고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해자는 혼자였고 어디에 전화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경찰서로 이동해서 피해 진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피해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너무 지치고 피곤해 잠을 잤다.
다음날부터 피해자는 외로웠다.
피해자는 대학생이었다. 학교를 갔는데 이상하게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외롭고 고독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집에 간 후에 피의자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지만 담당형사와 통화할 수 없었다.
피해자는 얼마 뒤 사건이 검찰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검찰 사건번호를 알아냈고 매일 인터넷에서 사건 진행사항을 조회했다. 중앙차로 버스정류장이 싫었고, 피의자가 내린 버스의 번호를 잊을 수 없었다. 여전히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있었으나 친구는 만나지 않았다. 웃긴 일이 있으면 웃었지만 길게 즐겁지는 못했다. 혼자 있고 싶었고, 혼자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반년 정도가 흘렀을 때 우연히 확인한 우편함에 법원에서 증인소환장이 와있는 것을 봤다. 출석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내야 한다고 되어있었다. 우연이지만 확인하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 했다고 생각했다.
피해자는 증인이 되었고, 피의자는 피고인이 되었다.
피해자는 법원에 가는 것도 처음이었고 법정에 증인으로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방청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피고인이 법정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피해자는 피고인이 자신을 못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증인석에 서면서 피해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방청을 하고 있어서 놀랐다. 다들 모르는 사람들인데 왜 이걸 보러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하기가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피고인은 자신의 변호사와 함께 와있었고, 피해자의 오른쪽 대각선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피고인이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해달라는 피해자의 요청은 피고인의 정면에 내려진 스크린으로 수용되었다. 피해자는 피고인을 볼 수 있었고, 피고인도 피해자를 볼 수 있었지만 어쨌든 요청은 그렇게 수용되었다.
중년의 남자 판사는 피해자에게 당시에 무슨 옷을 입었었느냐고 물었다. 피해자는 일부러 피해 당시에 입고 있었던 후드티를 그대로 입고 갔다. 그러자 판사는 버스정류장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버스는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었고, 버스정류장에는 어느 정도의 사람이 있었는지, 당시 피해자는 왜 거기에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봤다. 피해자는 설명을 했지만 판사가 이해하지 못했다. 피해자는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려고 했고, 판사는 거절했다. 그리고 판사는 피해자에게 피고인이 가슴을 ‘스치듯’ 만졌는지, ‘누르며’ 만졌는지, ‘쥐면서’ 만졌는지 물었다. 피해자는 자신이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 이야기했다. 이미 경찰에서 진술을 다 했는데 왜 또 물어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판사가 마치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판사의 질문이 끝나자 피고인의 변호사가 질문을 시작했다. 당시 피고인이 가방을 들고 있던 가방을 기억하느냐고 했다. 피해자는 황당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가방을 기억하지 못해서 자신의 피해가 거짓처럼 보일까 봐 처음 걱정되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면서 말이 떨렸다. 변호사의 어조는 공격적이었고 피해자는 점점 억울하고 화가 났다. 자신은 잘못이 없는데 왜 자신을 공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피고인은 1심에서 벌금 150만 원을 선고받았고, 불복하여 2심, 3심까지 진행하였다. 대법원에서 벌금 150만 원이 확정되었다.
그렇게 형사사건은 끝났다.
하지만 피해자는 판사와 피고인의 변호사를 잊을 수 없었다. 피고인보다도 그들에게 더 화가 나곤 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서러워서 생각하기를 그만두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생각이 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피고인이 벌금형이라도 처벌을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은 사라졌다. 피해자에게는 자신이 받은 피해들만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피해자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애썼다. 친구들을 만났고, 중간고사를 봤고, 밥도 잘 먹이고 잠도 잘 재웠다. 생각보다 자기 자신을 잘 살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피해자는 임상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이 되었고 피해자를 돕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피해자를 돕는 일을 하면서 그때의 자신은 용감했고, 이겼으며, 외상을 입었으나 지금은 성장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는 자신을 돕는 곳이 없었으나 이제는 자신이 도울 수 있고 도와줄 곳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피해자였고 피해자를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