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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듀발 Apr 28. 2023

HERE AM I; SEND ME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2020년부터 나는 피해자 지원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피해자들이 고객이라 긴장되고 무서웠고, 내 일이 너무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일이 조금씩 익숙해진 후에는 피해자들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잔뜩 주의를 기울이며 이야기를 듣다가 기운이 쪽 빠진 채로 퇴근하기 일쑤였다.


2년차가 되고부터는 화가 났다. 피해자들이 안쓰럽고 그만큼 화가 났다. 왜 이렇게 피해자는 도와도, 도와도 계속 늘어나는가. 나는 하나인데 피해자는 하루에 수십명씩 새로 나타난다. 한 명을 돕는 데 몇 달이 걸리는데, 하루에 수십명씩 새로운 피해자들이 나타나는 시스템 속에서 나는 도와줘야 할 피해자를 원치않게 ‘선택’해야 했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준은 세울 수 없었다. 그나마 세운 나름의 기준은 ‘피해가 심할수록 큰 범죄’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죄명이 ‘경범죄처벌법위반’일지라도 피해자가 일상이 파괴된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을 정말 ‘경범죄’라고 할 수 있을까.


피해자를 돕는 시간 동안 어쨌든 세상은 변해갔다. 21년 10월부터 스토킹을 처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정폭력에 해당하는 죄 수가 늘어났고 가정폭력 피해가 발생한 가정 내의 아동이 있을 경우 정서적 학대를 적극적으로 검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동청소년에 대한 그루밍 성범죄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피해자에 대한 지원도 조금씩 나아졌다. 없던 제도가 생기기도 하고, 있던 제도는 보완이나 발전되기도 했다. 사회의 관심도 높아져서 회사 내에서 피해자 보호를 언급하는 일도 늘어났다. 어쨌든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나아지고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피해자가 많아졌다. 수면 밑에 있던 피해자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인지,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가 늘어나서인지,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하면서인지, 내가 만나야 하는 피해자들이 늘어났고 내가 만나지 못하는 피해자들도 늘어갔다.


만나는 피해자들은 모두 제각기였지만 비슷한 일이 많았다. 자책하고 두려워하면서도 환경을 바꾸기는 쉽지 않고 사회적 지지를 확보하는 것도 어려운 때가 많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고 가장 먼 내게 그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씩 피해자들에 놀라울 만큼 비슷한 슬픈 이야기를 듣다 보면 퇴근 시간 쯤에는 누가 나에게 빨대를 꽂아서 에너지를 모두 뽑아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퇴근 후 긴장이 풀리면 멀미가 나는 것처럼 어질어질한 기분을 느낄 때도 많았다.


그리고 더욱 힘들었던 것은 이 싸움이 꼭 나 혼자만의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내가 담당하는 지역에서 이 일을 하는 사람은 (당시엔) 나 밖에 없었기에 이 일에 대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번아웃이 찾아왔다.


어느 날부터 피해자들에 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꿈 속에서 울거나 화를 내고 있었고, 때로는 내가 피해자가 되어있었다. 밤새 꿈을 꾸다가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면 잔 것도 안 잔 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일부러 운동을 격하게 하고 녹초가 되어 잠을 청해도 비슷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심리상담 제도를 받기로 하고 6회기의 상담을 받는 동안 나는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알아가야 했다. 6회기는 짧았지만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지금도 한 해의 불을 끄는 기분으로 연초마다 6회기의 상담을 챙겨 받는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친구를 붙잡고 너무 힘들고 외롭다고 엉엉 울었을 때 내가 여전히 괜찮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간접외상의 피해자임을.


간접외상도 외상의 하나이다. DSM-5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기준 중 외상은,


1. 외상성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2. 외상성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것을 목격함

3. 외상성 사건이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에게 일어난 것을 알게 됨

4. 외상성 사건의 혐오스러운 세부 사항에 대한 반복적이거나 지나친 노출의 경험


로 정의된다.


여기서 외상성 사건에는 신체적 폭력, 성폭력, 납치, 테러, 고문, 전쟁, 재앙, 심각한 교통사고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나의 외상은 4번에 해당했다. 그리고 덤덤해진다. 점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것은 나의 일이고, 직업이고, 먹고 살 수단이다. 대출금이 생각난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을 너무 좋아한다.


내가 하는 일은 피해자 지원 맞춤형 컨설턴트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취업했을 때는 지금처럼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엔 건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피해자였을 때의 기억이 다시 올라왔고 그 과정에서의 기억을 놓을 수가 없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서 듀발 형사가 성범죄에 대해서 ‘이건 극복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짊어지고 가는 상처야. 척추에 박힌 총알처럼’이라고 표현한다.


피해 이후 내가 수사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감정적인 경험들은 굉장히 묵직했다. 수사과정의 절차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고 동일하지만 감정적인 부분은 내가 어떤 자원을 갖고 있는지,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에 따라 너무 다르다. 그래서 내 사건에 대한 판결문을 한 번씩 본다. 나는 온전히 내 옆에 있었으니까. 10년도 더 전에 일어난 사건은 여전히 나의 인생을 흔들고 있다.

     

트라우마 후유증들에 대해서 나는 '기억이 체한 거다. 기억이 소화되지 않고 얹혀 있다‘는 비유를 많이 하는데 나는 이 일을 시작하고 난 뒤에야 소화가 됐다. 10년 가까이 걸렸다고 해야 할까. 이 일을 하면서 나와 같은 사건을 겪은 피해자들이 하루에 10명이 넘게 확인된다. 건조하게 쓰여진 그들의 피해내용을 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안을 받기도 하고 연대하기도 했다. 그렇게 천천히 소화됐다.


이 모든 감정이 피해자를 지원할 때 중요하다. 내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들, 생각한 비유들, 나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 했던 생각들, 피해자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


상담을 배울 떄 큰 고민중에 하나가, 나는 내담자의 문제를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미혼의 젊은 상담사인데, 이혼을 앞둔 중년의 내담자가 왔을때 이것을 어떻게 상담해야 하는지 짐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쩌면 무지에 대한 공포인데, 이런 고민이 있을 때 지도교수님이 그럼 세상의 모든 정신질환과 상황을 경험해볼 거냐고 했다. 맞다. 설령 똑같은 종류의 경험을 한다고 해도 같은 마음일 수는 없을 것이고, 공감과 동감의 차이는 크다. 피해자와 상담하다가도 비슷한 한계에 부딪혔던 때가 있었다. 모든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의 공포를 추측하고 수용할 뿐이다. 이럴 때마다 대학원 때의 저 이야기가 리플레이 된다. 사람들이 왜 역사를 공부하는지 알 거 같다.


종교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마음에 담고 있는 성경 구절이 있다.

앞서 언급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서 듀발 형사가 차에 붙이고 다니는 문구인데, "HERE AM I; SEND ME"이다. 누군가 가야 한다면 내가 가야지 뭐.


피해자는 다 나름의 일상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비일상적인, 비정상적인 일을 겪어서 일시적으로 비정상적인 반응을 정상적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나 같은 조력자들이 필요하고 나는 간다.


입사 준비를 할 때 충격이 컸었다. 피해자를 사건에 붙여서만 보고 피해 이전에 대한 생각을 안해봤던 거다. 스스로도 피해자였으면서! 왜였을까? 회피?


어쨌든 피해자가 이전에 어떤 일상을 살았는지는 굉장히 중요하고, 자연스럽게 내게 연락을 안 하는게 가장 좋다. 내가 없던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의미 같아서.


부디 그러니까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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